“성공확률 5,000대1. 인천으로 가는 길을 열어야 한다.” 지난 7월 27일 개봉돼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메인 카피다. 다시 맞는 9월 15일. 이날은 인천상륙작전 개시 66주년을 맞는 날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북의 남침으로 터진 6·25전쟁으로 백척간두에 놓였던 한반도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9월 28일 서울수복으로 이어졌고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대한민국은 기사회생, 다시 승전과 통일의 꿈을 안게 된다.

 

▲ 지난 7월 27일 정전협정일에 맞춰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 영화와 현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많은 사람들은 박진감 넘치는 전쟁신이나 주연배우들 간의 대결을 꼽는다. 그러나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다.

맥아더 장군과 소년병의 대화 장면이다.

“한 아이가 그러더군. 왜 후퇴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후퇴 명령이 없었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다해주겠다고 했더니 그 아이의 대답, ‘총과 충분한 실탄을 달라’고 하더군.”

“그 이후 난 결심했지. 그 아이의 나라를 꼭 지켜주겠다고.”

전쟁은 맥아더 장군에 의한 전쟁만은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과 유엔군의 작전이 아니라 이들을 돕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한 모두의 협력이 만들어낸 ‘승전보’인 것이다.

영화는 드라마로 구성이 됐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모든 이들의 간절한 소망과,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상륙작전을 결단한 유엔과, 작전 참가자 모두의 과감한 희생과 헌신이 작전의 ‘성공’을 이뤄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 리암 니슨과 우리나라의 실력파 배우 이정재, 이범수 등이 만들어낸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마침 작전 66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대한민국의 소중함’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희생’의 경건한 의미를 다시 일러주었다.

영화 대사처럼 그들은, ‘어머니’를 지켜냈고, ‘가족’을 지켜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작전 당시 - 구상과 준비과정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후방을 차단해 전세를 역전시킨다”는 구상을 수립한 것은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할 때였다.

그 같은 구상에 따라 최초로 수립된 상륙작전계획이 ‘블루하트작전’이었다. 그것은 미 제24사단으로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7월 22일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켜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고 지대 내 북한군을 격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진출속도가 예상 외로 빨라지는 등 전황이 달라지고 미 합동참모본부 내의 의견도 나뉘어 작전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8월 23일, 도쿄 극동군사령부 회의실에서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과 해군참모총장 셔면 제독 등 합참 요원과 맥아더, 유엔군사령부 참모들이 상륙지점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마침내 합참이 유엔군사령부의 계획을 승인함에 따라 맥아더 장군은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이어서 상륙작전일자를 9월 15일로 확정했다.

작전을 위한 부대 편성 및 기동상륙작전의 기본계획을 확정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했다. 그는 상륙부대로 제10군단을 창설해 그의 참모장인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고 극동군사령부에서 차출한 참모장교들로 군단사령부를 편성했다.

군단예하에 편성된 주요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보병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보병연대였다. 그리고 지원부대로 미 제2특수공병여단 등이 포함됐다. 그와 같이 편성된 상륙군 병력은 총 7만여 명이었다.

드디어 상륙 하루 전인 9월 14일 이들 부대들은 서해 중부 해상의 약정된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에 집결 완료했다.

 

작전 전개과정

드디어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됐다. 제1단계는 월미도 점령이었고, 제2단계는 인천 해두보 확보였다. 제1단계 작전에서는 항공모함에서 목표를 강타하고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함포사격을 집중하는 동안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월미도에 상륙했다.

제2단계 작전은 당일 오후에 시작돼 다음날 새벽에 끝났는데, 미 제5해병연대와 미 제1해병연대가 투입해 해두보를 완전히 확보했다.

그들은 곧 인천 시가지 작전을 전개했으며, 그동안 시가지 상공을 공중 관측기가 교대로 정찰했다. 또한 해병 항공기가 시내를 폭격하고, 해군기는 인천 부근을 중심으로 차단공격을 감행했다.

동시에 함포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모든 목표를 사격했다. 인천 시가지를 장악한 상륙부대들은 시가지 소탕작전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국군 해병대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어 미 해병대 제1사단은 9월 16일부터 한강으로 진격을 개시했다.

9월 18일부터 후속부대인 미 제7사단과 국군 제17연대가 상륙해 서울 수복과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고, 9월 27일 한국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한 후 소탕전을 전개해 9월 28일 수도 서울이 90일 만에 수복됐다.

이렇게 ‘성공확률 5,000대 1’의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에 남을 성공적 작전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수세를 벗어나 일시에 공세로 전환하면서 북진의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게 된다.

<인천상륙작전 관련 자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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