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시안에 위치한 한국광복군 미타고사 광복군 2지대 OSS훈련지 앞에서 기념촬영.

일제의 탄압을 피해 우리나라의 독립투사들이 활약했던 그 곳. 교과서 속 역사를 넘어 현장이 들려주는 역사를 배우기 위해 국가보훈처 온라인 기자단이 시안에서 베이징까지 독립투사의 발자취를 따라 걸었다. 그들은 왜 조국을 떠나 멀리 이곳까지 와야 했을까. 비행기를 타고도 4시간이나 걸리는 이 먼 곳에서 무엇을 이루려고 했을까. 이곳으로 올 수 밖에 없었던 독립투사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독립운동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다는 현장은 처참했다. 미국전략정보기관(OSS)의 특수훈련을 받았다던 남오대산 훈련장엔 공사자재가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었고, 한국광복군 제2지대 본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양곡 창고로 바뀌어 있었다.

또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옛터는 보존은커녕 아예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아마 80년 전 오늘은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로 뜨겁던 곳이었으리라.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을 역사의 현장이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우리는 근처에 한·중 양국 정부가 마련한 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 공원으로 갔다. 용맹했을 광복군의 흔적은 거의 없지만 기념공원이나마 남아 그들을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며 누군가는 기념비를 한참동안 보고 있기도 했고, 누군가는 함께 모여 경례를 하는 등 각자 저마다의 방법, 그러나 같은 마음으로 선열들을 추모했다.

다음으로 조선의용군 화북지부 흔적을 찾아 한단시로 갔다. 이곳에서 조선의용대 핵심인물인 윤세주, 진광화 열사의 묘를 찾아 헌화했다. 독립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순국한 두 열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모두가 한 마음으로 숙연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먼 타국 땅에서 찾는 이 없이 외로웠을 두 열사를 위해 묵념하고 묘소 주위를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감사함을 대신했다.

1944년 1월 조선의용군 주력부대가 연안으로 떠난 후 모여든 조선인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 독립을 향한 열망이 가득한 눈으로 수업을 듣던 청년들의 자리엔 이제 중국 어린이가 앉아 동요를 부르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때 그 청년들의 열정이 건물에 남아 있는 듯 했다.

독립운동 현장 답사의 마지막 장소는 베이징이다. 이곳도 우리 독립운동가의 땀방울이 진하게 스며있다. 승려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운암 김성숙 선생이 공부했던 민국대학,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애국지사를 대접한 우당 이회영 선생 거주지, 일제에 저항하는 시 ‘광야’를 발표하고 우리에게는 일제 수감번호 ‘이육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원록 선생의 순국지. 가는 곳곳마다 그들의 숨결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탐방기간 동안 만난 독립투사들은 ‘왜’라는 이유가 없었다.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내 조국, 내 후손들이 살아갈 터전이기 때문에 그토록 힘들게 지키고자 했을 뿐이다.

탐방단 중의 누구는 사라진 흔적에 대한 안타까움을, 다른 누군가는 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를 마음에 품었을 것이다.

8월의 더위보다 더 뜨거웠던 그 시절 광복군의 정신이 젊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계승돼 더 밝은 대한민국을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길 기대한다.

<국가보훈처 온라인기자 홍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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