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배경과 신한청년당의 활동

올해는 3·1운동 98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일제의 강고한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얻기 위해 만세를 외쳤던 역사적 사건이다.

1910년 일제에 강제 병합된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큰 고통을 당했다. 국외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줄기차게 투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이 된 일제의 국제적 지위는 더욱 상승했다. 승전국들은 전후처리와 군비축소 및 국제평화를 논의하기 위해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4개 조항의 원칙을 제시하는데, 그 핵심은 민족자결주의였다.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1918년 8월 20일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파리 강화회의를 대비했다. 신한청년당 의장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에 대표로 파견해 파리위원부를 설치했다.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에 독립공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과 접촉하며 한국을 지원토록 호소했다.

신한청년당은 국내와 일본, 만주 길림과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사회에도 특파원을 보내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소식을 전하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 동안 독립만세 시위를 일으켜 전 세계에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천명하고 한국독립의 기회로 삼을 것을 역설했다.

 

2·8독립운동과 선언문에 나타난 독립정신

당시 재일 유학생들도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관철돼 일제의 폭압으로부터 해방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1918년 12월 29일 도쿄 유학생 학우회 주최로 송년회가 열리고 이튿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는 동서연합 웅변대회가 개최됐다.

이때 모인 400~500명의 학생들은 조국광복운동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의하고 독립운동의 방안에 대해 토론했다. 마침내 김도연, 최팔용, 서춘, 백관수, 이종근, 송계백, 김상덕, 전영택, 윤창석, 최근우 등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후일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고 이광수와 김철수가 추가됨)하고 극비리에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했다.

이들은 백관수의 자취집에 모여 1주일동안 밤을 새며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국문, 일문, 영문 등으로 등사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인쇄했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도쿄 중심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임원 선거를 명목으로 유학생대회를 열었다. 여기에 도쿄 유학생 거의 전부인 600여 명이 참가했다.

이 자리에서 유학생대회는 조선청년독립단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역사적인 2·8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시위행진도 계획했으나 급파된 도쿄 경시청의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 진입해 독립선언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독립선언서 서명자와 그밖에 20여 명이 체포 구금돼 도쿄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재판정에서 독립선언의 정당성을 당당히 주장했다.

2·8독립선언의 서두는 ‘조선청년독립단은 아 2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라고 시작한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세계 최고 민족의 하나로 주권을 잃어본 적이 없는데, 이제 일본이 기만적인 방법으로 강제 병합한 사실과 우리 민족에 자행한 만행을 비판했다. 그리고 일본이 한국을 군국주의 방식으로 계속 지배하려든다면 그것이 동양평화를 해치는 화근이 될 것이며 한민족은 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3·1운동의 전파와 역사적 의의

2·8독립선언은 한국의 젊은 유학생들이 적의 수도 한복판에서 한민족의 독립 대의(大義)를 선언하고 독립만세를 외쳐 거족적 항쟁인 3·1운동을 촉발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8독립선언의 영향으로 국내에서는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혁신세력이 33인 민족대표를 구성하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학생과 시민들도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에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3월 5일 서울역 앞에서는 1만여 명의 학생 시민이 모여 제2차 대규모 시위운동을 벌였다. 3월 중순 이후 시위운동은 서울과 도시에서 지방 읍면지역으로 확산됐다. 3·1운동은 한국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뿐 아니라 한국민의 근대적 시대의식과 역사정신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만세시위를 통해 다수의 민중은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투철한 애국의식을 갖게 됐다.

3·1운동은 만주 등의 해외거주 한인사회로 확산되며 이를 계기로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조직된 독립군 부대가 통합을 이뤄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부대로 편제됐고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선포하고 무장 항일투쟁을 수행했다. 중국, 러시아, 미주 등지에 거주하는 국외 한인사회는 3·1정신을 한민족 정신의 자산으로 삼았다.

또한 3·1운동은 한민족에게 주체적인 독립 쟁취의 자신감을 줬고 독립운동 참여 계층의 확대로 한민족의 독립역량은 큰 비약을 가져왔다. 특히 여성들이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국민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3·1운동에 참여해 새로운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3·1운동은 일제에 의해 열등하고 미개한 민족으로 악선전된 한국민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투쟁함으로써 독립할 수 있는 자격이 충분히 있음을 전 세계민에 입증했다. 반면 평화적 시위를 폭력 진압한 일제는 만세시위자들에게 야만적인 태형을 가해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성을 스스로 세계에 폭로했다.

3·1운동 이후 끈임없이 전개된 한국민의 항일투쟁은 국제사회에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에의 열망과 의지를 각인시켰다. 또한 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인류의 자유와 독립해방에 대한 자극과 용기를 주었다.

이명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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