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우리 민족 최고 최대의 독립운동이다. 3·1운동의 위대한 점을 이야기하려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우리는 그 중에서 특히 다음 3가지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첫째, 3·1운동은 한민족의 도전정신을 보여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4달 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일본은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일본의 위상은 올라갔고, 국제적 발언권이 강해졌다. 당연히 우리 독립에 불리한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사상 최초로 국가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전쟁비용으로 엄청난 부채에 시달리게 되었을까? 아니다. 엄청난 이익을 보았다.

 

한민족의 위대한 도전정신 입증

전쟁터는 유럽이었다. 일본은 피 흘리지 않고 독일이 가진 중국 산둥반도 칭타오 등 조차지나 태평양에 위치한 섬들을 차지했다. 일본은 또한 연합국에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밤을 새워 공장을 돌려야 했다. 개항 이후 60년간 만성적인 적자였는데, 대전 특수경기로 일약 흑자국으로 도약했다. 호황으로 돈이 넘쳐서 쌀 투기가 일어나 1918년 여름 ‘미(米)소동’이라고 하는 주부들의 폭동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지배체제를 단단하게 구축했다. 한국 주둔 2개 사단을 기반으로 군대와 경찰을 통합한 헌병경찰제로써 한국인의 저항을 10년간 거의 완벽하게 억눌렀다. 10년에 걸친 토지경계 측량과 소유권 조사 등 토지조사사업을 완료했다. 여기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을 일대 개편했다. 경성과 평양 같은 대도시는 외곽지역을 분리하여 약화시키고, 지방의 군, 면, 동리는 3~5개씩 떼고 붙이고 하여 지방의 공동체적 유대를 해체했다. 또한 면의 기능을 강화하고, 90% 이상의 면장을 친일인사로 교체해 식민지 지배 체제를 탄탄하게 완성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지배체제는 거의 완벽하게 구축됐다.

이에 반해 1910년대 만주와 연해주에 건설한 우리 독립운동기지들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연해주에서 추진한 대한광복군정부(정통령 이상설) 수립과 광복군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한 계획이 무산된 것이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라는 미국 학자는 “모든 혁명은 썩은 문짝을 차 엎는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 모두 낡은 체제가 자체 모순으로 썩은 문짝처럼 흔들흔들하던 것을 혁명세력이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3·1운동 때 일본은 국제적으로는 전승국, 경제적으로 흑자국, 그리고 식민지 지배체제를 완성한 시점이었다. 썩은 문짝이 아니라 새로 튼튼하게 만든 철문이었다. 거기에다 우리 독립운동은 대전의 발발로 초토화되다시피 했다. 3·1운동은 이런 상태에서 불가능에 도전해 일어났다.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둘째,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민족임을 보여 주었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 후 곧바로 경무총감부에 구금됐다. 발발하는 순간 운동 지도부가 공백이 된 것이다. 당장 파고다 공원에서 문제가 됐다. 오후 2시 입추의 여지없이 청년학생, 시민들이 모여 들었는데, 어떠한 주도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회중 속에 있던 청년지사(정재용) 한 사람이 스스로 나서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선언서를 낭독해 거대한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됐다.

지방에서도 민족대표를 원망하고 앉아 있지 않았다. 주민들이 스스로 주도자가 되어 온갖 창조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계획하고 이끌었다. 자발적으로 기꺼이 참여하고 봉사하며 희생하는 새로운 국민, 새로운 시민정신이 탄생했다.

셋째, 3·1운동은 21세기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20세기 전반은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폭력과 억압의 시대였다.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약소국의 독립이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47개국이, 1950 ~60년대에 아시아 아프리카 90개국이 독립했다. 다시 80~90년대 구소련 치하의 동구권이 해체되면서 29개국이 독립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200여 개 독립국가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세계사적 전환의 시점이 3·1운동이 일어나던 그 때였다. 세계는 3·1운동이 제시한 ‘독립’ ‘해방과 자유’의 길을 따라 전개되었다.

 

수평적 연대, 협력, 자발성 분출

다른 한편 20세기 전반은 혁명의 시대, 영웅의 시대, “나를 따르라!”는 시대였다. 그러나 3·1운동으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가 합시다!”하는 운동이 탄생한 것이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개개 마을 상황에 따라 독창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거리시위는 기본이고, 상가 철시시위, 산상 봉화시위, 시신을 운구하며 벌인 운구시위 등 갖가지 방법이 다 창안됐다. 수평적 연대와 협력, 위대한 자발성이 분출됐다.

21세기가 되면서 20세기 식 “나를 따르라!”는 영웅주의, 수직적인 지시통제문화가 퇴조했다. 자발성과 창조성이 화두가 됐다. 100년 전 3·1운동은 바로 21세기가 절실히 요구하는 수평적 문화, 다원적 협력, 쌍방향 소통의 길을 실제로 열어 보여주었다.

3·1운동은 한민족이 불가능에 과감히 도전한 역사였고,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국민의 탄생이었으며, 21세기 새로운 방식 즉, 수평적 문화, 다원적 협력, 쌍방향 소통이라는 3·1문명의 길을 제시한 운동이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세계의 선진국, 21세기 신문명의 선도자라 할 수 있다.

해방 후 자유의 나라가 되자 한강의 기적, 한류 문화가 불같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3·1운동을 기억하고, 3·1운동이 보여 준 도전정신, 자발적 능동적 국민, 21세기적 수평적, 다원적, 쌍방향적 방식을 발전시켜 간다면 한민족은 세계에 우뚝 서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이다.

 

이정은 (사)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 전 독립기념관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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