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재탈환의 정점을 찍는 시가전의 병사들.

6·25전쟁은 대한민국과 북한 간의 ‘수도 쟁탈전’이었다. 수도 서울이 북한의 남침 4일차에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이에 질세라 국군과 유엔군은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전쟁 발발 4개월 만에 양측의 수도가 적에게 뺏고 뺏기는 세계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보기 드문 상황이 연출됐다.

전쟁에서 수도는 군사적·정치적·심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도를 빼앗긴 입장에서는 전쟁에 졌다는 패전의식이 감돌면서 군은 물론이고 국민들의 사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반면에 적의 수도를 빼앗은 입장에서는 전쟁에 이겼다는 승전 기분에 전쟁에 뛰어든 군이나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 입장에서 모두 들뜨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찍이 고금동서의 전략가들은 상대편의 수도를 제1의 공격목표로 삼고 여기에 군사력을 집중해 조기에 수도를 공략하고자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2차세계대전 시 히틀러는 프랑스의 파리를 조기에 점령했으나 유럽의 전쟁을 끝낼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함에 따라 패전했다. 일본도 중국의 수도인 남경을 손쉽게 점령했으나 장개석(蔣介石) 정부의 임시수도인 중경 공략에 실패함으로써 결국 패전국의 멍에를 짊어지게 됐다.

 

수도서울 선점 위한 일진일퇴

북한의 김일성도 6·25전쟁을 일으켰을 때 주저함이 없이 제1의 군사적 목표를 수도 서울에 두었다. 김일성의 수도 서울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평양에 공산정권을 수립했음에도 북한헌법에 그들의 수도를 ‘서울’로 못 박았다. 그런 점에서 당시 북한이 쓰고 있던 평양은 임시수도였던 셈이다.

김일성의 서울 점령의지는 강했다. 북한군은 서울 점령을 위해 전쟁 개시와 함께 38선을 넘은 북한군 7개 사단 중 6개 사단과 북한군 유일의 전차여단인 105전차여단을 수도권 공략에 동원했다. 전차는 물론이고 전차를 파괴할 변변한 대전차무기도 없는 국군의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국군의 진지를 무력화하며 남하하는 북한군 전차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때 궁여지책으로 나온 것이 맥주병이나 음료수병에 휘발유를 넣은 화염병과 여기에 수류탄을 묶어 적 전차에 돌진하는 육탄전이었다. 그렇게 해서 수도 서울을 4일 동안 지켜냈다. 그만큼 전쟁에서 수도는 전쟁의 향방을 가늠케 하는 풍향계 역할을 했다.

1950년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이 여세를 몰아 38선을 돌파하여 드디어 적의 수도 평양을 점령했다. 미1군단에 배속된 국군1사단이 열악한 기동장비에도 불구하고 선두로 평양에 들어갔다. 국민들은 감격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육군본부 수뇌부들은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국군은 압록강변의 초산에 당도했고, 미군은 두만강과 인접한 압록강 상류의 혜산진에 도달했다.

이때 중공군이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이라는 북한과의 지리적 이해관계와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싸우는 조선을 돕는다)’는 전략적 명분을 내세워 한국전선에 불청객으로 뛰어들었다. 30만 대군을 앞세운 중공군의 인해전술과 그들의 야간기습공격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평양을 내주고 38선으로 물러났다. 그것도 부족해 다시 서울을 내주고 남한지역에서 동서 간의 길이가 가장 짧다는 평택-안성-원주-삼척 선까지 물러났다. 1950년 1월 4일을 전후한 상황이었다.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중공군의 막대한 병력을 앞세운 공격에 한반도에서의 철수까지 거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위기일발의 숨 가쁜 순간이었다. 그 과정에서 미8군사령관이 교통사고로 순직하고, 리지웨이 중장이 후임 사령관에 임명됐다.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사령관은 중공군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다. 이어 37선에서 38선을 향한 작전을 구상했다. 거기에는 수도서울에 대한 재탈환도 포함됐다. 이를 위해 리지웨이 사령관은 중공군에 이길 대응책도 마련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을 앞세운 공격에, 유엔군은 그들보다 우세한 포병·함포·공중화력으로 맞선다는 계획이었다. 병력을 앞세운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에 화력의 우세를 이용한 유엔군의 화해전술(火海戰術)의 맞대결이었다.

그리고 중공군의 장기인 국군과 유엔군의 부대 간의 빈틈으로 침투해 아군 후방으로 깊숙이 들어와 지휘소 습격 등 후방교란을 일삼는 중공군의 전술에, 국군과 유엔군이 상호 어깨를 나란히 하고 보조를 맞춰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매 작전시마다 부대의 진출을 통제하는 통제선을 설정해 운용했다. 작전 중 통제선에 빨리 도달한 부대는 다른 부대가 통제선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음 통제선으로 진격하는 개념이었다. 이런 식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향해 한 걸음씩 중공군을 압박하며 진격해 나갈 계획이었다. 리지웨이의 이런 전법에 중공군은 당황했고, 국군과 유엔군은 커다란 성과를 냈다.

 

육군·해군 합동적전으로 적퇴각 유도

중공군의 3차공세로 37선까지 밀려나 그곳에서 휴식과 정비를 끝마친 국군과 유엔군은 드디어 중공군을 찾아 나섰다. 리지웨이 입장에서는 공산군이 어디에 얼마만한 병력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각 군단별로 1개 연대씩을 차출해 전방으로 내보냈다. 탐색전이었다. 수원과 여주 선까지 적의 저항은 별로 없었다. 적에 대한 탐색을 끝마친 리지웨이는 드디어 1951년 1월 25일 한강 이남을 목표로 한 ‘썬더볼트(thunderbolt)' 작전을 전개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2월 10일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 이남까지 진출했다. 서울 이남의 한강변에는 국군1사단이 진출해 있었다.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리지웨이 사령관은 수도 재탈환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적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하면 적의 강력한 저항에 국군과 유엔군이 많은 피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설령 서울을 점령했다고 해도 서울북쪽의 산악지형을 배경으로 공산군이 저항하면 한강을 등지고 싸우는 국군과 유엔군의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 고민 끝에 리지웨이 장군은 서울 동쪽에 해당하는 뚝섬과 양수리 방향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진출시켜 의정부와 포천으로 나아가게 하면, 서울에 있던 공산군이 측방으로부터 포위위협을 느끼고 스스로 서울에서 철수하게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때 리지웨이는 평양에 집결해 있던 중공군이 수도권으로 증원되지 못하도록 평양의 서쪽 관문인 진남포에 유엔해군 상륙작전을 가장했다.

이른바 양동작전이다. 이 작전이 적중했다. 평양에 주둔한 중공군 대병력은 위장 상륙작전에 겁을 먹고 서울로 병력을 보내지 못했다. 대신 뚝섬과 양수리를 도하한 미 25사단과 미3사단이 서울 동측방으로 진격하자 서울에 있던 공산군은 예상했던 대로 포위위협을 느끼고 북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한강 남안의 국군1사단장 백선엽 준장은 직속상관인 미1군단장 밀번(Frank Milburn) 장군에게 서울 재탈환작전을 건의했다. 밀번 군단장의 답은 오케이였다. 1951년 3월 15일 아침, 백선엽이 지휘하는 1사단은 드디어 서울재탈환에 나섰다. 선두인 15연대가 여의도에서 마포 쪽으로 도하했다. 뒤이어 사단본대가 뒤따랐다. 감격적인 서울 재탈환작전에 신성모 국방부장관,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 미1군단장 밀번 장군이 지켜봤다. 예상했던 대로 적의 주력이 빠져나간 서울에는 산발적인 총격만 있었다.

탈환한 수도 서울의 모습은 두 차례의 전화(戰禍)로 처참했다. 남대문도 한쪽 귀퉁이가 날라 갔다. 그렇지만 수도 서울을 재탈환한 국군의 감격은 남달랐다. 이후 서울은 적의 끈질긴 공세에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 작전은 한미양국의 지휘관과 장병들의 지략과 뛰어난 공로가 아닐 수 없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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