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강에서 철수한 직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제29여단 장병들.

중공군 4월 공세는 30만명을 동원한 대공세였다.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30일까지 전개된 중공군 4월 공세는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 개입 이래 최대 규모였다. 공세목표는 분명했다.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다시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중공군은 1950년 10월 25일 한국전선에 뛰어든 이래 승승장구했다. 한마디로 거침이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이래 38선을 돌파하고 두만강과 압록강을 향해 쾌속으로 진격해 올라오던 국군과 유엔군을 청천강선으로 밀어낸 다음, 막대한 병력을 앞세워 평양과 흥남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몰아낸 후 그 여세를 몰아 38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때가 1950년 12월 상황이었다.

 

마성의 소리 이겨낸 반격으로 38선 회복

그 과정에서 미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순직했고, 후임에 미 육군참모차장이던 리지웨이 중장이 후임 사령관에 임명됐다. 리지웨이 장군은 미군 공수복장에 앞가슴에는 두 개의 수류탄을 매단 챈 한국전선에 용감하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2차대전시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을 전율케 했던 공수사단장과 공수군단장을 역임했던 리지웨이 미8군사령관도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중공군의 기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전선은 또 다시 남쪽으로 밀렸다. 리지웨이 장군은 수도 서울까지 중공군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안됐다. 그러나 이후 아군의 총력을 다한 노력으로 후퇴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그곳이 바로 남한지역에서 동서 길이가 가장 짧다는 평택-안성-원주-삼척을 연결하는 37선이었다. 그때가 1951년 1월 초순이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37선에서 재편성과 휴식, 그리고 실전 같은 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중공군에게 대반격을 시작했다. 1951년 1월 25일부터 시작된 리지웨이의 대반격작전에 중공군은 맥을 추지 못했다. 중공군은 원주에서도 그랬고, 지평리에서도 맥없이 무너졌다. 그들의 장기였던 인해전술도 통하지 않았고, ‘마성(魔性)의 소리’로 국군과 유엔군을 괴롭혔던 야음(夜陰)의 피리소리, 나팔소리, 꽹과리소리도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결국 아군은 수도 서울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그리고 전선은 38선에서 형성됐다.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2월공세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베이징으로 달려갔다. 얼마나 급했던지 평소 타지 않던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날아갔다. 펑더화이는 곧장 마오쩌둥(毛澤東)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그때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야행성인 마오쩌둥은 자고 있었다. 펑더화이는 보초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마오쩌둥이 자고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자다 일어난 마오쩌둥에게 “속결로는 승리를 거두기가 어렵다”며 전선 상황을 단도직입적으로 보고했다. 이어 펑더화이는 “한국전선의 병사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식사도 못하고, 탄약도 없으며, 동상자가 속출하고 있고, 채소는 구경도 못해 야간 전투가 많은 병사들로서는 야맹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털어놨다. 더욱이 “조선 청년들은 다 달아나 동원하기 어렵고, 겨울에는 동서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이 겹쳐 무척이나 춥고, 또 인원보충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으면 현 상태로는 도저히 싸울 수 없다”며 부대 상황을 솔직히 보고했다.

사태파악을 한 마오쩌둥은 즉각 대책마련을 강구했다. 대규모의 중공군을 새로 보충했고, 포병부대와 대공포부대도 대폭 증원했다. 식량 및 탄약도 부족하지 않도록 지원해줬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전장에서의 주도권 장악은 물론이고, 수도 서울을 다시 무력으로 빼앗아 전세를 만회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바로 중공군의 4월 공세다. 중공군 4월 공세는 전열을 다시 가다듬은 중공군과 반격작전을 통해 상승세를 타고 있는 국군, 유엔군과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였었다. 중공군 개입 이래 최대의 결전이 전개될 판이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에 총력을 다했다. 중국본토에서 새로 보충된 제19병단과 제3병단 그리고 장진호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함흥에서 재정비를 완료한 제9병단을 새로 투입했다. 그리고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을 중동부전선에 투입했다. 중공군은 30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면서 취약한 국군사단을 노렸다. 최초 미군사단에 비해 화력이 약한 강원 화천의 사창리에 배치된 국군6사단을 기습해 돌파구 마련에 성공했다. 이어 영국군 29여단이 배치된 파주의 적성지역을 공격했다. 중공군의 노림수는 뻔했다. 중부전선의 국군6사단을 노린 것은 돌파구를 남쪽으로 깊숙이 형성해 전선을 분리한 다음 각개 격파하겠다는 것이었고, 영국군 29여단을 기습한 것은 수도 서울로 통하는 도로를 우회 차단해 그곳의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 섬멸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국군6사단지역은 다행히 미 해병사단과 영연방 28여단을 긴급 투입해 경기 가평에서 중공군을 막아냄으로써 그들의 전선확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한편 서부전선의 영국군29여단이 방어하고 있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 일대의 적성지역은 사정이 좋지 못했다. 중공군은 이 지역에 3개 사단을 투입해 첫날부터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서울로 진출하기 위한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적들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던 영국군 29여단의 글로스터 대대는 중공군에 완전히 포위된 채 고립됐다. 그때가 1951년 4월 23일경이었다. 영국군 참전자는 당시의 중공군 공격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증언했다. “중공군 10명을 쓰러뜨리면 20명이 나타났고, 20명을 쓰러뜨리면 30명이 나타났다.” 대살육전이 전개됐다. 그러다보니 글로스터 대대는 식량도 떨어지고, 탄약도 떨어져갔다. 공중보급도 피아가 혼재해 있다 보니 여의치 않았다. 전선은 점차 대대지휘소가 있는 235고지 일대로 몰렸다. 1694년에 창설된 글로스터 대대는 파평산 자락의 설마리의 235고지에서 워터루전투와 갈리폴리 전투 이래 44번째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창설 이래 중공군과 최대의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고립된 채 ‘미8군의 칼끝’ 역할

235고지에서 싸우고 있던 글로스터 대대에게는 먹을 물이 부족했다. 고지라 물을 구할 수도 없었다. 출혈을 많이 한 총상환자에게는 물이 필요한데도, 주지 못했다. 수냉식(水冷式) 기관총은 총신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보다 못한 선임하사가 물통을 들고 참호속의 병사들에게 가서 오줌을 받으려고 했으나, 물을 먹지 못한 병사들에게서 오줌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오줌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오줌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선임하사는 한 명은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 와중에 중공군은 공세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피리소리를 불며 235고지를 향해 개미떼처럼 기어 올라왔다. 이에 질세라 글로스터 대대의 군악대장도 나팔을 불며 대응했다. 때 아닌 ‘나팔전쟁’이 벌어졌다. 순간 중공군의 나팔소리가 멈췄다. 일순 고요가 깃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공군의 공세는 다시 시작됐다. 중공군이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그곳을 지켜 본 대대장 카니(Carne) 중령도 마지막 결단을 했다. 대대의 참호에서 30미터 떨어진 곳까지 공중폭격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글로스터 대대는 그렇게 ‘지옥 같은 60시간’을 전우애와 부대에 대한 자존심으로 버텨냈다. 상급부대도 고립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최후를 예상한 카니 중령은 중대장을 소집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각 중대별로 탈출할 것을 지시했다. 대신 대대장과 군목 그리고 군의관은 부상당한 60여명과 함께 남기로 했다. 적진을 뚫고 탈출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았다. 하비 대위가 이끈 D중대만이 겨우 대오를 유지한 채 탈출에 성공했다. 그것도 38명뿐이었다. 글로스터 대대의 전체 탈출자는 84명에 불과했다. 대대 889명 중 805명이 전사, 포로, 부상자가 됐다. 그렇지만 글로스터 대대는 중공군 4월 공세를 맞아 최전선에서 고립된 채 ‘미8군의 칼끝’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글로스터 대대의 용전(勇戰)과 희생으로 서울을 향한 중공군 4월 공세는 끝내 좌절됐다.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사수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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