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문산 전투에 참가한 육군 제6보병사단 병사들.

국군 6사단은 북한 남침이후 ‘무적의 부대’로 알려졌다. 개전 초기부터 국군 6사단은 북한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춘천 및 홍천전투에서 북한군 2군단을 격파함으로써 수원 이남으로 진출해 한강이북의 국군주력을 격멸하려던 북한군 남침계획을 좌절시켰고, 나아가 육군본부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창설해 한강선 방어전투를 통해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할 시간적 여유를 갖게 했다.

이후 6사단 7연대는 동락리 전투에서 북한군 15사단 1개 연대를 섬멸함으로써 국군 최초의 대승을 거둬 연대 전 장병 1계급 특진이라는 영예를 누렸고, 낙동강 전선에서는 신령 및 영천지구에서 용맹을 발휘해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춘천을 통해 38선을 돌파한 6사단은 북진해 국군과 유엔군 중 가장 먼저 압록강 국경도시 초산에 진격했던 역전의 부대가 됐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그렇게 승승장구하며 용맹을 떨치던 6사단에게도 불운이 겹쳤다.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한국전에 개입하면서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달한 6사단은 중공군의 주요 목표가 됐다. 그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전쟁초기부터 사단을 지휘해왔던 김종오 사단장이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으면서 후송됐고, 후임 사단장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9사단장에 임명된 장도영 준장이 부임했다. 이때가 1950년 10월 말경이었다.

그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에 대해 공세를 늦추지 않고 계속 몰아쳤다. 급기야 전선은 청천강에서 38선 그리고 37선까지 밀려나게 됐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25일부터 대반격에 나섰고, 1951년 4월 중순 경에는 임진강입구에서 전곡-사창리-화천-인제-속초를 잇는 선까지 진출하며 대략 전쟁 이전 상태를 회복하게 됐다.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후퇴를 거듭하던 중공군도 이 무렵부터 공세준비에 분주했다. 더 이상 물러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베이징에서 돌아온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도 각오를 다지며 대규모공세를 준비했다. 이른바 1951년 4월 22일 개시된 4월 공세였다.

강원도 화천의 사창리(史倉里)에 배치됐던 6사단은 중공군 4월 공세의 주요 목표였다. 6사단 방어정면으로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는 거센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6사단지역으로 중공군 4개 사단이 덮쳤다. 쏘고 또 쏘아도 시체더미 위로 넘어오는 중공군을 막을 길이 없었다. 4월 22일 밤 9시에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 앞에 6사단은 불과 2시간 만에 무너졌다. 사창리를 적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중과부족이었다. 거기다 지형과 기상마저 6사단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사창리 지역은 산이 중첩된 험지인데다 변덕스러운 날씨로 유명했다.

중공군이 공격할 때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사단이 맡은 전선도 20킬로미터로 1개 사단이 맡기에는 너무 넓었다. 중공군은 안개를 이용해 6사단의 방어지역 틈새를 찾아 마치 연기처럼 스며들며 공격했다. 6사단은 이를 악물며 버텼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가평까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국군 6사단을 공격한 중공군 40군은 실전경험이 많고, 산악전과 야간전투에 능한 팔로군 출신들이었다. 그 과정에서 6사단은 대포와 차량 등 막대한 무기와 장비를 잃었고 병력피해도 절반이 넘었다. 사단 창설 이래 최대의 패배였다.

 

오욕 씻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겠다

직속상관인 미9군단장 호그(Hoge) 장군은 장도영 사단장을 질타했고, 새로 부임한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Van Fleet) 장군도 사단지휘소로 달려와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사단장에게 “싸울 수 있느냐(Can you fight)”며 다그쳤다. 악에 받친 장도영 장군은 “예스”를 연발하며 맞고함을 쳤다. 그 기세에 눌렀던지 밴플리트 장군도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6사단이 후퇴 과정에서 잃어버린 무기와 장비를 보충해주고 전선에 그대로 남아 작전을 계속하도록 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에서 30만 명을 동원해 서울을 다시 점령하고,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동서로 양분해 쟁취하려고 했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5월 16일 5월 공세를 전개했다. 5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전력이 약한 국군을 격멸하고 전선의 균형을 무너뜨린 다음, 미군을 전·후방에서 공격해 격멸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공격 목표도 현리 지역의 국군 3군단과 용문산지역의 6사단에 집중됐다. 바야흐로 용문산에서 국군 6사단과 중공군의 대격돌이 다가오고 있었다.

용문산은 양평 동북쪽에 위치한 1,057미터의 고봉이었다. 주변에는 700미터 이상의 봉우리들이 형성돼 있었다. 중공군이 욕심낼만한 작전상의 요충이었다. 용문산 앞으로는 청평-가평-춘천을 잇는 길이 있었고, 뒤로는 서울로 연결되는 양평이 있었다. 6사단은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인 4월 27일경 용문산으로 이동해 왔다.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한 장도영 장군이 지휘하는 6사단은 이를 설욕하기 위해 정신무장을 강화하며 실전 같은 훈련을 실시했다. 장도영 사단장은 장병들에게 “청성 용사들이여, 유서 깊은 용문산을 ‘호국 매골(埋骨)’의 성지로 삼자. 사창리에서의 오욕을 설욕하여 필승무패의 청성부대를 되찾자”고 호소했다. 장병들은 “오욕을 씻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를 지켜보던 사단장을 비롯한 연대장과 대대장들도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장병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철모 양편에 사단의 상징인 6각형의 청성(靑星)마크를 붙였고, 그 위에 ‘결사(決死)’라는 머리띠를 동여맸다. 사단 장병들은 모두 용문산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을 각오였다.

결전이 다가왔다. 송대후 중령이 지휘하는 2연대가 전초부대로 나섰다. 중공군 주력을 전초지역으로 유인하는 역할이었다. 2연대는 사단 전방에 대대단위로 사방으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적이 어디로 오든지 격퇴하는 사주방어(四周防禦) 개념이었다. 중공군이 그곳이 사단의 주저항선인줄로 착각하고 주력을 투입하면, 용문산에 배치된 나머지 7연대와 19연대의 2개 연대가 공격해 중공군을 격멸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때 포병화력과 공중화력도 합세해 중공군에 섬멸적 타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군 궤멸…호수 ‘파로호’ 명명

작전승패의 열쇠를 쥐고 있는 2연대가 마침내 트럭을 타고 전초지역으로 떠났다. 탄약은 실을 수 있는 데까지 실었다. 장병들은 양말에 쌀을 채워서 목에 걸었다. 홍천강을 건너 배수진을 쳤다. 예측한 대로 중공군 63군 예하의 3개 사단이 2연대의 전초지역을 사단의 주저항선으로 착각하고 몰려들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용문산지역의 2개 연대가 밀고 내려왔다. 그 여세에 중공군은 맥없이 무너지면서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중공군 2만5,000명 중 2만 명을 사살하고 3,200명을 생포했다. 부상병까지 합치면 완전섬멸이었다.

보고를 받은 육군본부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용문산에서 화천까지 추격하는 과정에서 6사단은 포로들을 주워 담았다. 진격하는 길가마다 중공군 패잔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중공군들은 허기에 지쳐 있었고, 탄약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싸울 의지와 기력도 없었다. 국군 소대병력이 중공군 대대병력을 사로잡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처럼 훌륭한 부대에 어떤 상을 내려 줘야 할 것인가”고 묻고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여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중공군을 궤멸시킨 화천저수지를 오랑캐 중공군을 물리친 호수라는 의미에서 ‘파로호(破虜湖)’로 명명했다.

반면 중공군 수뇌부는 참담한 패배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사실은 베이징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긴급 보고됐다. 마오쩌둥은 크게 실망했고, 중공군사령관 펑더화이는 자신의 책임이라며 안절부절 못했다. 이로 인해 중공군 180사단은 해체되고, 사단장과 부사단장은 보직 해임, 직속상관 60군사령관도 중징계를 받았다.

국군 6사단은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른바 ‘용문산대첩’의 신화를 얻었다. 6사단은 용문산에서 중공군에게 섬멸적 타격을 가함으로써 불과 1개월 전에 당한 사창리 전투의 패배를 말끔히 씻고, 역전에 빛나는 청성부대로 거듭나게 됐다. 중공군 5월 공세를 저지한 용문산 대첩은 국군 6사단 장병의 애국충정과 결사정신이 빚어낸 6·25전쟁 중 최대의 쾌거였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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