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어느 비오는 오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켠에서 자신이 가진 특별한 재능으로 6·25참전용사인 할아버지의 애국심을 추모하는 사람이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직접 만든 곡으로 MBC 창작동요제 대상을 수상했고 이제는 정상급 작곡가로 우뚝 선 작곡가 정예경 씨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인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할아버지의 삶을 1시간짜리 작은 공연 속에 녹여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문화 공연 프로그램 ‘박물관 춤추고 노래하다’의 기획 프로그램인 이번 공연은 음악과 이야기로 국가유공자 할아버지의 삶을 소개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그가 직접 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이력에는 2등이 없다. 공부를 하던 시절에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그는 19세 때 소프라노 조수미의 오케스트라 악보를 5시간 만에 채보해 유명세를 탔다. 그 후로 개인 앨범을 발매하고 뮤지컬, 영화, 드라마의 음악감독으로 활약하는 등 세계가 탐내는 작곡가가 됐다. 그의 이런 음악적 성공 뒤에는 그를 아끼고 아꼈던 할아버지, 정의석 중사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제게 친구 같았어요. 선생님이기도 했고요. 한글, 한자, 일본어 같은 것들은 할아버지가 직접 다 가르쳐 주셨고, 당신 드시는 것까지 저와 반반 나눠 먹었죠. 제가 첫 손녀라 그렇게 예뻐해 주셨던 것 같아요.”

황해도 출신 할아버지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홀로 월남, 자진 입대해 총을 들고 싸웠다. 그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휴전 후 남한에 홀로 남겨진 할아버지는 가족을 찾다 정착한 집에서 지금의 할머니를 만났고, 두 사람은 서울 불광동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결혼 후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거친 세상 속을 헤치고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첫 손녀를 세상 누구보다 아꼈다.

“제가 4살 때 할아버지께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 ‘피아노’입니다. 피아노를 사주신 후에는 가족끼리 모여서 작곡도 하고 연주도 하면서 서로 간의 사랑이 더욱 돈독해졌다고 할까요? 그게 휴식이고 공부였고, 우리 가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매개체이기도 했습니다. 피아노 한 대로 행복한 시간이었죠. 그 피아노는 지금도 제 작업실에 ‘모셔져’ 있어요. 음악을 하면서 많은 좋은 피아노가 제 손을 거쳐 갔지만 이것만큼은 절대로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죠.”

그래서일까.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빼어났고, 그 자신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계속 키워갔다. 그는 성실하게 사는 삶 자체가 애국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의 남다른 애국심이 그를 이만큼 성장시켰다고 믿는다.

할아버지는 나라의 혜택을 받는 국가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교통 등을 이용할 때 반드시 요금을 지불했다.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 받는 것도 민폐라고 생각해 자리를 피하는 등 할아버지의 너그럽고 배려 넘치는 삶의 태도를 존경했다. 음악회 내내 할아버지를 소개하는 그의 목소리에 애정이 담뿍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애국’은 멀리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집 앞을 쓸고,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것이야 말로 조국을 아끼는 것이라고 믿으셨어요.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살고 남에게 베푸는 삶이 애국의 첫걸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국’이라는 숭고한 마음은 이념대립으로 얼룩지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죠.”

이렇게 한 시간 여 할아버지의 삶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그가 예정에도 없던 공연을 시작했다. 자신의 공연에 처음으로 발걸음 해주신 할머니와 고인이 되신 할아버지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

 

 

돌아가시기 전 많이 아프셨던 할아버지가 감정의 동요를 일으켜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칠까봐 눈을 감는 순간까지 아끼는 손녀딸의 노래를 한 곡도 들려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제가 소개한 이야기는 비단 제 할아버지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정의석 중사’가 있어요. 오늘 공연을 통해 참전용사의 희생을 다 같이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날 공연 이후 그는 6월 25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호국보훈음악회에서 6·25전쟁을 배경으로 직접 작사·작곡한 ‘1950년 서곡’을 연주했다. 역시 할아버지와 6·25참전용사를 추모하는 음악이다. 그는 앞으로도 이날 공연처럼 ‘나라사랑’을 테마로 한 연주회를 가끔 열 계획이다.

가치 있는 일에 재능과 열정을 기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마치고 ‘고향의 봄’을 잔잔히 부르는 그의 얼굴에 할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짙은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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