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겨우 한글을 해독하시는 정도였다. 그러나 수리에서는 성냥개비를 나열해 계산하는 솜씨가 웬만한 주판실력을 웃도는 정도였다.

또 여러 가지 다양한 솜씨도 남달라 매듭짓는 솜씨는 장인수준을 넘보는 수준이었고, 집안 구석구석 엄마가 불편하지 않게 잔손을 많이 봐 주셨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 늘 가난에 시달렸지만 몸으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마다 않고 가족을 위해 애쓰셨다.

부모님은 결혼 후 14년 만에 첫 출산을 하셨지만 불행하게도 여덟 달 키운 첫아들을 열병으로 잃었다고 한다. 다행히 연이어 지금 일흔아홉의 오빠와 일흔여섯의 언니와 일흔둘의 내가 태어나 그런대로 화목한 가정이 꾸려지고 우리 삼 남매는 조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는 특히 늦둥이인 막내딸을 많이 사랑하셨다. 평생을 시장을 모르고 사셨던 엄마를 대신해서 바늘이나 실 같은 사소한 것까지 아버지가 다 해결해 주셨다. 그런 일로 시장나들이를 하실 때마다 꼭 막내딸을 데리고 다니며 그 철에 나는 과일이며 옥수수 등을 꼭 사주셨다.

나는 유독 병약해서 열다섯 살부터 스물다섯까지 급성관절염과 폐결핵을 앓는 막내딸 때문에 밤이고 새벽이고 아버지는 약국과 병원을 뛰어다니시고 엄마의 밤잠 못자는 간호와 눈물을 많이 보게 되었다. 너무 큰 불효였다.

내가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던 날 몸씨 추운 겨울이었는데(그 때는 중학교 입시가 요즈음 대학 입시만큼 요란스러웠다)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와 쉬는 시간이면 삶은 달걀을 보리차와 함께 먹게 해주셨다. 그 때 그 삶은 달걀은 어쩌면 그렇게도 맛있던지. 딸의 그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미소가 지금도 그립다.

어느 날 시장 좌판에서 먹던 소고기국밥은 밥알과 고기는 딸을 먹이고 우거지와 국물만 드시던 아버지의 국밥처럼 따뜻한 마음 잊을 수 없다.

그 사랑 갚을 기회도 없이 강원도에서 신혼 3년차를 보내고 있을 때 오빠와 함께 사시던 아버지께서 오래 앓던 천식이 재발해 위독하시다는 전보를 받고 대구로 내려갈 준비를 하던 중 별세 전보를 다시 받고 통곡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모습을 못 뵈어서일까.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도 아버지는 그냥 멀리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요즘 보훈가족으로 자주 병원을 드나들면서 주위에 오래 누워계시는 환자들을 보면 문득문득 아버지 생각이 난다. 머지않아 우리도 맞게 될 그날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모습의 부모로 기억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주위에 간혹 갈등을 겪으며 지내는 가족들을 보면 누구나 언제든 맞게될 그날 이후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서로 많이 사랑하고 배려하며 따뜻하게 지내기를 바래본다.

아무리 자식이 잘해도 부모가 자식 사랑하는 만큼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 잊지 않는 것도 사랑 때문이리라 스스로 위안을 해 본다.

아버지, 우리 아버지, 사랑했고 고맙습니다.

정표년 시조시인. 보훈병원에 입원 중인 남편(파월 맹호부대 소총소대장으로 참전)을 간호하고 있으며, 1990년부터 3권의 시조집을 냈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