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 24사단 병력이 부교를 타고 낙동강을 도하하고 있는 모습.

6·25전쟁의 최대 위기는 낙동강전투였다. 1950년 8월,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대한민국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로 미 지상군과 유엔군 일부가 참전했다고는 해도 전세는 쉽게 만회되지 않고, 북한군에게 여전히 밀리는 형국이었다. 맥아더의 유엔군사령부에서는 북한 후방지역의 전략목표에 타격할 B-29와 B-26전략폭격기까지 북한군의 남진 저지에 동원했다.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 격이다.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진해 앞바다에는 일찌감치 미 항공모함이 투입돼 북한군의 공세저지를 위해 함재기들을 지상을 향해 연신 발진시켰다.

이 모두가 낙동강 전선을 지켜내기 위한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 발악’이었다. 그럼에도 북한군은 ‘여름철의 극성맞은 모기’처럼 낙동강전선을 방어하고 있는 국군과 미군을 향해 연일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결전이 낙동강 전선 이곳저곳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한 곳이라도 무너질 경우 대한민국 운명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대구의 관문인 왜관과 다부동이 위협을 받는가하면, 어느 새 부산으로 연결되는 창녕과 밀양의 교두보인 낙동강 돌출부인 영산 전선이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러다가 부산의 서부관문이라 할 마산이 적의 위협을 받았다. 그럴 즈음 국군이 방어하고 있는 동부전선도 북한군의 위협에 크게 노출됐다. 울산을 통해 부산으로 연결되는 동해안의 관문인 포항이 함락되고, 경주와 대구로 연결된 영천이 북한군 공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워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북한군 최종목표인 부산으로 연결된 낙동강 전선의 어느 곳 하나 안전하지 못하고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이때쯤 한국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의 전격전에 밀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유럽대륙에서 영국으로 해상철수했던 ‘덩케르크(Dunkirk)의 철수’를 빗대, ‘한국에서의 덩케르크’는 없다고 못 박았다.

낙동강전선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미8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도 “고수냐, 죽음이냐!(Stand or die.)”라는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선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예하 지휘관들에게 잘라 말했다.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이때 우리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나섰다. 여기에는 나이도 상관없었다. 여성이니 남성이니 하는 성별도 문제되지 않았다. 오로지 나라의 위기를 보고, 국민들이 분연히 궐기했다.

어린 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 싸우게 해달라며 군문(軍門)을 두드렸다. 그리고 교복을 입은 채 전선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북한군과 싸우다 최후에는 ‘어머니’를 부르며 장렬히 산화했다. 나라를 위해서 죽었다고는 하지만 앳된 죽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은 조국을 살린 생명수 역할을 했다.

 

호국의 여성, 주먹밥으로 전투 지원

여성들도 “나라를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치겠다”며 자원해 입대했다. 여성들은 경향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여성들은 육군과 해군, 공군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해병대까지 지원했다. 나라를 위해 죽는 마당에 어떤 군복을 입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멀리 제주도의 여성들까지 참여했다. 제주도의 나이어린 여학생들과 처녀들은 제주도에 있는 해병대에 들어갔다. 해병대가 통영상륙작전을 통해 ‘귀신 잡는 해병’으로 명성을 떨친 직후였다.

그렇게 해서 여성들은 국군이 있는 곳이라면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나라를 위해 일하며 싸웠다. 전사상자들이 속출했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복 입은 호국의 여성들이었다. 여성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선 인근의 부녀자들은 어린아이들을 등에 들쳐 업고, 군인들이 먹을 주먹밥을 만들어줬다. 군인들은 그것을 먹고 싸웠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군대에 갈 나이가 훌쩍 지난 이 땅의 30·40대 장정들은 지게를 들고 싸움터로 나섰다. 젊은이들처럼 직접 전선에 나가 싸움은 못하더라도,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들에게 먹을 음식과 탄약을 날라주겠다고 했다. 이른바 지게부대였다. 전쟁사에서는 노무부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낙동강 전선에서 노무부대의 활약상은 유명하다. 그 더운 폭염의 날씨에 그들은 적 포탄과 총알이 난무한 가파른 산악지형을 식량과 탄약을 짊어지고 갔다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내려 올 때는 부상자를 들것에 들고 내려왔다.

6·25전쟁의 최대의 위기이자 대한민국에게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던 낙동강 전선은 군인들과 국민들의 피땀으로 지켜졌다. 애국에는 나이와 성별이 필요 없었고, 호국에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전투가 바로 낙동강 전선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나라의 위기 앞에서 모두가 하나가 되어 싸우고 또 싸웠다. 대한민국이 위대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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