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 10월 1일, 국군에 의해 38도선이 최초 돌파된 후 찍은 기념사진.

6·25전쟁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국군에 의한 38도선 돌파였다. 북한 남침 이후 서울을 빼앗기고 낙동강까지 밀려났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서울을 탈환하고, 남북 분단의 상징이던 38도선을 돌파했다.

그때가 바로 1950년 10월 1일이다. 38도선이 돌파되자 국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38도선 돌파는 누가 보든지 통일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때부터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통일에 대한 희망으로 들뜨게 됐다.

그런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열망에 불을 확 지핀 것은 바로 대한민국 국군이었다. 남침 이후 동해안에서 악전고투하며 싸웠던 국군3사단이 낙동강 전선의 포항과 영덕에서 출발해 강릉과 주문진을 거쳐 38도선이 놓여있는 있는 강원도 양양에 도달했다. 그때가 바로 9월 30일이다. 숱한 전투를 치르며 북녘 땅을 바로보고 선 국군 장병들의 감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겼다.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유엔군사령부에서 아직 38도선 돌파에 대한 명령이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국군 단독으로 38도선을 넘어 북진했다가는 분명 군 지휘계통상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었고, 나아가 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될 소지가 다분했다. 38도선 돌파는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38선 앞두고 유엔군 고민 깊어져

북한 남침 이후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결의함으로써 유엔회원국으로 하여금 군대를 파병해 한국을 돕도록 했다. 그때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유엔군이 수행해야 될 전쟁목표를 ‘전쟁 이전 상태의 회복’으로 정했다.

이른바 38도선을 넘은 북한군을 무력을 사용해 38도선 이북으로 쫓아낸다는 것이었다. 유엔안보리로부터 위임받아 전쟁지휘본부 역할을 하고 있던 미 합참이 한국에서 유엔작전을 총괄하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주었던 임무도 북한군을 38도선으로 격퇴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38도선을 군사적으로 회복하라는 것이었지, 38도선을 돌파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유엔의 전쟁방침은 국군3사단이 38도선에 도달할 때까지 유효했고, 유엔군사령부는 그 범위 내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유엔의 전쟁방침은 아직 바뀐 것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군이 38도선에 도달했다고 해서 넘을 수는 없었다. 국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문제의 소지를 없애려면, 유엔에서 먼저 전쟁방침을 변경할 필요성이 있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남침전쟁이지만, 유엔의 입장에서는 ‘유엔의 전쟁’이었다. 왜냐하면 유엔안보리는 대한민국에 대한 북한의 무력공격을 국제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북한에 대한 무력 제재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유엔안보리는 유엔군을 통합 지휘할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해 운용하도록 조치했다. 그런 점에서 6·25전쟁은 비록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었지만, 전쟁수행은 유엔이 총괄하는 유엔의 전쟁이었다.

 

최초 돌파, ‘국군의 날’ 연원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대한정책이 비록 ‘전쟁 이전 상태의 회복’에서 ‘한반도의 통일’로 바뀌었다고 해도, 유엔에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유엔의 정책으로 채택해야 했다.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정책이 한반도통일정책으로 확정된 것은 1950년 10월 7일이었다.

그에 따라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예하 부대들은 10월 9일에야 38도선을 돌파하게 됐다. 이는 유엔총회 결의에 따른 적법적인 군사행동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10월 7일 유엔 결의가 있기 전까지는 국군이 아무리 빨리 38도선에 도달한다 해도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유엔군사령부가 국군의 38도선 돌파를 승인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러했다. 1950년 9월 29일, 서울 탈환식에 참석했던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원수에게 38도선 돌파문제를 꺼냈을 때, 맥아더는 아직 유엔에서 그에 대한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정 총장은 이를 원만히 해결해야 될 입장에 놓였다. 그렇지 않으면 작전지휘권 행사를 놓고 한미간 군사적 대립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정 총장은 대통령의 북진명령도 받들면서, 유엔군사령부와의 작전지휘권 행사에 대한 마찰도 피할 묘안을 강구했다. 워커 미8군사령관을 찾아가 38도선 북쪽에 있는 북한군 진지가 아군에게 위협적인데, 그것을 파괴하고 내려오겠다고 했다. 이에 워커도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다가, 정 총장에게 그렇게 하라며, 38도선 월경을 승인했다.

정 총장은 곧장 강릉에 있는 1군단사령부로 가서 김백일 군단장과 함께 양양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3사단 23연대 3대대에게 38도선 돌파를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국군3사단이 최초로 38도선을 돌파하게 됐다. 통일을 향한 힘찬 거보였다. 뒤이어 38도선에 도달한 국군사단들도 38도선을 넘었다. 국군이 38도선을 최초로 돌파한 10월 1일을 현재 ‘국군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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