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을 아침, 서울 보라매공원에는 한 줌의 햇살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반탁반공순국학생충혼탑’을 앞에서 만난 노병은 함께 입대했다가 포항 전투에서 전사한 고등학교 친구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인터뷰를 위해 몸을 추스리고 일어섰다. 그는 미 7사단 소속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했던 이규석(85) 참전유공자다.

그는 며칠 후에 서울현충원에서 열릴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을 앞두고, 최근 초청장을 받았다. 그 순간 당시의 고통과 전우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저는 18살이었어요. 부산까지 피난을 내려왔다가 8월 쯤 카투사 1기 보충대로 입대하게 됐죠. 미국 7사단에 소속돼 일본에서 3주간 교육받고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습니다. 그게 저의 첫 번째 참전이었어요.”

총을 만져본 적도 없는 18세 어린 학생이었던 그는 미군부대로 입대해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는 군복과 군화를 지급받고 고작 3주 훈련을 받자마자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다. 그는 그렇게 서울을 탈환할 때까지만 해도 곧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장진호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근처에서 갑작스럽게 중공군이 꽹과리를 치면서 몰려오더니 순식간에 장진호 주변을 에워쌌어요. 어마어마하게 많은 군대가 무기도 없이 인간띠를 만들어 포위하기 시작하는데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부대가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영하 40도의 강추위 속에서 땅이 얼고 눈이 덮여 포를 세우거나 진지를 구축하는 것도 어려웠고, 통신 두절로 보급품을 제대로 받을 수도 없었다. 중공군은 기껏해야 50미터, 100미터 떨어진 곳에서 대치하며 아군을 압박했다.

“먹을 것이 없어 사나흘 간 고드름과 눈으로 연명하기도 했어요. 부대원들은 동상에 시달렸지만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치료는커녕 몸이 썩어 들어가는데도 절단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괴로움이지요.”

전투와 악천후 속에서 죽어간 전우들은 땅이 얼어 묻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전우의 시체를 넘어’ 전투와 후퇴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추운 날씨에 아군도 중공군도 지쳐만 갈 때, 전문가들이 회자하는 ‘전사 상 가장 완벽한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흥남철수작전이다. 그의 임무는 여기까지였다.

 

▲ 지난달 25일 열린 장진호 전투영웅 추도식에서 생존 참전용사들과 나란히 앉은 이규석 참전유공자(오른쪽에서 세 번째).

“후퇴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진격 중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그 철수작전으로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국군과 유엔군은 흥남에 도착했다. 그리고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유엔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까지 완벽하게 남쪽으로 탈출시켰다.

그때 함께 탈출한 어느 피난민 부부의 아들은 훗날 피땀으로 지킨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돼 방미 첫 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 헌화식을 가지기도 했다. 그의 참전과 전공이 그래서 최근 더욱 빛이 나는지도 모른다.

“6·25전쟁은 북한의 갑작스러운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지만, 모두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했지요. 이제는 젊은 세대가 우리나라를 이끌어야 하고, 지켜야 하고, 이 땅에서 살아나가야 하니까요. 잘 해줄 것으로 믿어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힘겹게 말을 이어오던 그가 마지막 한마디만큼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때보다 무기와 기술, 전략이 한참 발전된 현대식 전투의 경우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텐데, 다시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전쟁은 무가치 하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는 그에게서 그동안 그의 삶에 6·25전쟁 당시 겪은 참담함과 고통이 얼마나 깊게 사무쳐 왔는지 느껴졌다. 이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그래서 평화로운 시민의 공원을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 짓는 노병의 눈빛이 더욱 따뜻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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