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 공세를 준비 중인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와 장교들의 모습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총공세를 계획했다. 바로 크리스마스 공세였다. 크리스마스 공세는 1950년 11월 24일 단행됐다.

맥아더는 11월 24일 총공세를 펼쳐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전쟁을 완전히 끝낼 계획이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크리스마스를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고향에서 보내게 할 참이었다. 크리스마스 공세에 동원된 병력은 국군과 유엔군을 합쳐 29만에 달했다. 맥아더가 전쟁을 종식시킬만한 충분한 병력이었다.

이를 위해 서부전선의 미8군과 국군2군단, 동부전선의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이 동원됐다. 맥아더의 계획에 따르면 미8군과 국군2군단은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의 넓은 전면에서 압록강을 향해 공격하고, 미10군단은 동부전선에서 북서쪽으로 공격해 만포진·강계·희천 축선상의 적의 보급선을 차단, 국군1군단은 두만강을 향해 계속 공격하는 것이었다.

 

낭림산맥과 중공군이라는 벽을 넘어

그러나 크리스마스 공세에는 지리적 제한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부전선의 미8군과 동부전선의 미10군단 사이에 드높은 낭림산맥이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공간은 직선거리로 무려 80km에 달했다.

맥아더 사령부에게는 커다란 장애물이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공군이었다. 그런데 맥아더 사령부는 중공군의 존재를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거기에는 유엔군사령부 나름의 판단 때문이었다. 유엔군사령부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세를 계획할 무렵, 한국에 있는 공산군 병력을 10만 명으로 판단했다. 그 중 북한군이 3~4만, 중공군이 기껏해야 6~7만 정도로 추산했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에 들어온 중공군 병력은 30만 명이었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것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커다란 오판이 아닐 수 없었다. 맥아더의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후에 전사가들은 이를 ‘재난(災難)으로의 눈먼 행군’이라고 평가했다.

맥아더 사령부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유엔군사령부에서는 적정 수집을 항공관측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중공군 대부대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공군은 낮에는 숨고, 밤에만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야간항공관측을 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다.

중공군은 오로지 야간에만 이동했다. 하루의 행군은 날이 어두워진 후인 저녁 7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에 끝냈고, 이후 아침 5시 30분까지는 유엔항공기에 대한 방어대책을 세웠다. 중공군은 병력, 동물, 장비를 철저히 숨기거나 위장했다. 주간에는 다음 야영지를 물색하는 선발대만 이동했다. 부득이 주간에 행군할 때도 유엔항공기를 만나면 모든 병력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어기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그렇게 해서 중공군은 북한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하루 평균 29km씩 행군했다. 놀라운 행군능력이 아닐 수 없다. 중공군 30만 명은 그렇게 북한에 잠입해 들어와 맥아더가 야심차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공세에 맞섰다.

맥아더가 크리스마스 공세를 강력히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전황이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비록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의 1차공세로 서부전선의 국군과 유엔군이 청천강 선으로 밀려나긴 했지만, 이후 중공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다 동부전선의 미10군단과 국군1군단은 빠른 속도로 북진하고 있었다. 11월 중순 국군 수도사단은 소련국경에서 불과 100km 떨어진 청진에 도달했고, 이보다 서쪽에서 진격하던 바르(Barr) 소장이 지휘하는 미7사단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혜산진에 도달했다.

 

성과 못이룬 재난…전쟁의 시작

보고를 받은 맥아더 장군은 미10군단장 알먼드 장군에게 “진심으로 축하한다. 바르 장군에게도 대승을 축하한다고 전해주게”하며 축전을 보냈다. 알먼드 장군은 바르 장군에게 “불과 20일전에 이원에 상륙해 영하의 기온에서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적과 싸우면서 320km의 험준한 산길을 진군한 사실은 군 역사에 하나의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라는 축전을 보냈다.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이런 승리에 대한 낙관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크리스마스 공세는 1950년 11월 24일 금요일 아침 10시에 시작됐다. 맥아더는 전선으로 달려와 유엔군장병들을 향해 “만일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이는 사실상 전쟁을 종식시킬 것이고 한국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훈시했다.

하지만 이런 맥아더의 낙관적 분위기와는 달리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 30만 명이 덫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함정 속으로 서서히 다가가고 있었다. 서부전선에는 중공군 18만 명이 청천강을 넘어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기다리고 있었고, 동부전선에서는 중공군 9병단 12만 명이 장진호로 들어오는 미 해병1사단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유엔군과 국군을 중공군이 기습했다.

서부전선에서는 미2사단이 중공군의 덫에 걸려 사단전체 병력의 4분의 1을 잃었다. 미2사단을 돕기 위해 터키여단이 투입됐으나 역부족이었다. 서부전선의 국군2군단도 무너졌다. 동부전선의 미 해병1사단도 곤욕을 치렀다. 맥아더가 야심차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공세는 재난으로 끝났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38선으로 밀려나야 했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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