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6년 경찰 창설 1주년을 기념해 시가행진을 벌이고 있다.

6·25전쟁은 전후방이 없는 전쟁이었다. 전선에서는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국군과 유엔군이 싸웠고, 후방에서는 지역치안과 안정을 위해 경찰들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없이 전개했다. 1,129일 지속된 전쟁기간 동안 전방지역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과 중공군 등 공산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후방지역에서는 국군의 지원을 받은 경찰들이 지리산 일대 등 험준한 산악지형을 무대로 게릴라 활동을 펼치고 있는 공산 빨치산들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할 당시 경찰은 내무부 산하 치안국의 통제를 받았다. 미 군정기 중앙부처의 하나였던 경무부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면서 중앙부처의 1개 국으로 전락했다. 전국 경찰의 총수인 치안국장과 서울시 경찰 책임자인 서울시경국장은 같은 2급 공무원으로 임명됐고, 당시 경찰 내 최고 계급이었던 경무관은 치안국 과장과 각도 경찰국장으로 보직됐다. 경무관 다음의 총경은 경찰서장이 됐다.

미 군정기 국군의 전신인 경비대를 관장하던 통위부(統衛部)는 그대로 국방부가 되면서 조직 내 변동이 없었으나, 경찰은 그 조직이 대폭 축소되면서 계급도 하향 조정됐다. 정부 출범 당시 국방부 내 국장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개전 초기 38선 방어전 나서

경찰은 그런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이했다. 군에 비해 그 지위나 위상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경찰은 국군과 같이 전쟁초기부터 북한군의 남침을 받고 38도선에서부터 싸웠다. 주민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경찰서나 파출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 치안을 위해 배치돼 있던 경찰들이 북한군의 남침에 국군과 같이 싸웠다.

당시 전국에는 160여 개의 경찰서가 있었다. 치안국이 비상경비총사령부 체제로 바뀜에 따라 서울시경찰국과 각도 경찰국은 경비사령부로, 그리고 전국 경찰서들은 전투경찰부대를 편성하고 군과 같이 작전태세에 돌입하게 됐다. 그렇게 됨으로써 전국의 경찰들은 고유의 임무인 치안유지를 담당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역 내로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을 무찌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방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들을 토벌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6·25전쟁 당시 대통령의 경호는 경찰이 맡고 있었다. 전쟁이 났을 때 경무대경찰서장이 전쟁 상황을 제일 먼저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경무대경찰서장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경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경찰의 통신체계는 군보다 월등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선의 경찰서에서 올라온 전쟁 상황을 국방부보다 먼저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에 대한 경호·경비는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던 경찰이 맡고 있었다. 전쟁 발발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이 부랴부랴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로 장갑차 1개 소대를 급파하고, 대통령에 대한 경호, 경비를 강화했으나 그것도 얼마가지 못했다. 전선 상황이 위급해지자 경무대로 급파된 장갑차 소대가 다시 전선으로 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경찰의 장비와 무기는 군에 비해 그처럼 열악했고, 군사력도 미흡할 때였다.

 

중공군 개입 이후 후방안정작전 주력

전시 경찰의 임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군과 보조를 맞추면서 국가기간시설인 철도, 군의 주보급로, 주요 교량, 철교, 터널, 발전소, 정부 식량창고에 대한 경비에 들어갔다. 경찰은 전쟁 중 부상을 입은 군과 민간인들에 대한 후송도 담당했다. 경찰의 임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쟁으로 발생한 수백 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구호활동도 병행해서 실시했다.

그리고 피난민을 가장하고 침투해 들어오는 적의 오열(五列)을 색출하는 임무도 맡았다. 나아가 후방으로 침투해 들어온 적들에 대한 후방교란도 차단해야 했다. 이들 오열과 후방침투에 의한 교란에 가장 취약했던 부대가 미군이었다. 한복으로 갈아입고 피난민으로 가장 한 적의 오열을 색출하기 위해 미군들은 조병옥 내무부장관에게 경찰을 파견해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피난민으로 가장한 적의 오열문제가 간신히 해결됐다.

그 중에서도 경찰이 가장 힘들게 수행했던 것은 전투였다. 경찰들은 38선 접경지역에서부터 낙동강 전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각도별 비상경비사령부 통제 하에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북한군의 남진에 따라 정규작전에 버금가는 작전을 수행했다.

이후 경찰들은 서울탈환작전, 38선 돌파작전, 북진작전, 그리고 중공군 개입 이후에는 후방지역의 안정화 작전을 위해 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찰들이 희생됐다. 육군 다음으로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그들의 희생과 애국심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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