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가장 큰 배이며 유일한 전투함이었던 450톤급 백두산함. 첫 승전보의 주역이다.

6·25전쟁은 바다에 의존한 ‘해군전쟁(naval war)’이었다. 그것은 전쟁기간 내내 대한민국에 들어온 군수물자의 99.6%가 바다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역할은 매우 컸다. 그것도 전쟁 초기 해군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당시 해군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더라면 대한민국은 전쟁을 수행하기도 전에 극도의 혼란에 빠지거나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쟁 당일부터 북한이 노렸던 부산과 관계가 있었다. 부산은 대한민국 최대의 항구도시로 전쟁을 수행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략적 항구였다. 대부분의 병력과 물자가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은 6·25전쟁 때 대한민국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전략적 교두보였다.

 

1천톤급 수송선 막은 백두산함

북한의 남침공격계획에서 최종 목표는 부산이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부산을 조기에 점령하게 되면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나게 돼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전쟁모의 과정에서 미군의 개입을 우려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부산을 사전에 봉쇄해 미군의 참전을 막고자했다. 부산만 점령하면 미국은 전쟁에 개입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통해 한반도에 병력과 군수물자를 보내야 하는데, 부산을 먼저 점령하게 되면 미국으로서는 대한민국을 돕고 싶어도 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은 전쟁 초기에 부산을 점령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항구로서 역할을 무력화시키고자 부산을 노렸다. 북한은 부산의 이러한 전략적 이점을 알고 전쟁당일 1,000톤급의 대형수송선에 특수훈련을 받은 무장 게릴라 600명을 태우고 동해상을 거쳐 대한해협으로 진출했다. 당시 우리나라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가장 큰 배는 450톤급의 백두산함이었다.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당시 우리 해군의 보유하고 있던 유일한 전투함이었다. 그 당시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배들은 대부분 300톤급 미만의 소형 선박이었다. 1,000톤급 무장수송선은 엄청난 크기의 배였으며 톤수로도 백두산함의 2배가 넘는 배었다.

6·25전쟁에서 해군과 바다 그리고 부산의 역할은 대단했다. 이에 대해 6·25전쟁 당시 2년간 미8군사령관을 역임했던 밴플리트 장군은 “우리는 한국에서 해군이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또 바다의 힘이 없었다면 미국은 병력·장비·항공기들을 전쟁터에 보낼 수 없었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줄 수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미국의 그런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장비들은 모두 부산항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런 점에서 부산은 전쟁수행에 있어서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생명줄이었다.

그런 관계로 북한은 전쟁 초기부터 부산을 노렸다. 전쟁 초기 수도 서울도 적의 집중공격으로 위험했지만, 적의 위험에 더욱 노출된 곳은 바로 한반도 남단의 대한민국 최대의 항구도시인 부산항이었다. 부산항은 대한민국이 필요한 병력과 전쟁물자가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실제로 전쟁기간 내내 부산항을 통해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과 군수물자가 들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부산항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절대적으로 확보해야 될 전략적 목표가 됐고,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전쟁을 수행하고 나라를 지탱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될 ‘국가수호의 생명줄’이었다.

 

게릴라 저지, 개전 초기 전황 바꿔

대한민국 해군의 유일한 전투함이던 백두산함이 북한 무장수송선을 발견한 때는 전쟁 당일인 6월 25일 20시 12분이었다. 최초 발견된 곳은 부산동쪽에서 약 50km떨어진 해상이었다. 백두산함은 이곳 해상에서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괴선박’을 발견하고 끈질긴 추적 끝에 그 괴선박이 북한해군의 무장수송선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치열한 교전 끝에 6월 26일 새벽 01시 25분에 마침내 침몰시켰다. 발견된 후 5시간 13분만이었다. 숨 막힌 교전이었다. 이때 무장수송선에 타고 있던 북한군 게릴라 600명도 함께 물속에 수장됐다.

이로써 대한민국 해군은 전쟁 초기 부산으로 상륙해 대한민국 후방을 교란하려던 북한군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그때 특수훈련을 받은 적 게릴라 600명이 부산에 상륙했더라면 6·25전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을 것이다. 미군은 물론이고 유엔군도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오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한해협 전투는 6·25전쟁 발발 이래 국군이 거둔 최초의 전투이자 승리였다. 또한 그 전투는 북한군의 남침계획을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을 수호한 전투이기도 했다. 약 70년 전 그날 조국 수호를 위해 바다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백두산함 용사들과 대한민국 해군 장병들에게 뜨거운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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