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수갑 어르신의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는 이소윤 보훈섬김이.

문밖으로 새어 나오는 옛날이야기가 구수하다. 현관문을 밀고 들어가 보니 바람 솔솔 불어오는 창가에 앉은 할아버지 한 분이 열여덟 살 적 6·25전쟁 이야기를 엊그제 있었던 일처럼 풀어내고 있다. 청중은 딱 한 사람이다. 얼핏 시아버지와 며느리인가 싶은 이 두 사람은 구순이 넘은 황수갑(92) 어르신과 환갑을 넘긴 이소윤 보훈 섬김이다.

보훈섬김이 제도가 틀을 잡고 정착하기 전부터 국가유공자 어르신들 곁에서 그들을 돌봤던 이소윤 섬김이는 올해 64세 정년을 앞두고 있다. 어르신들을 모시고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나이가 먹는 줄도 몰랐다며 수줍게 웃는 모습에 시원함이 조금, 아쉬움은 가득 묻어 있다.

“처음엔 낯선 사람이 집에 드나드는 것이 싫고,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 이 여사를 물리쳤지요. 그런데 조금 지나고 보니 사람이 아주 성실하고 선하고 내 얘기도 잘 들어주고, 이제 벗이나 다름없어요.”

올해까지만 온다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에게 박 어르신은 이 여사가 ‘놀러와’ 주지 않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서로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실 저도 보훈가족입니다. 경찰이었던 남편이 89년에 순직해 대전현충원에 모셨죠. 갑자기 혼자가 돼 막막했을 때 의지할 곳이 보훈처뿐이더라고요. 자주 드나들고 관심도 갖고 하다가 보훈처에서 재가복지 국가유공자를 대상으로 요양복지를 추진하는 것을 알게 됐고, 보훈가족들과 저는 ‘같은 처지’라고 생각해서 섬김이를 자청했어요.”

그 자신도 보훈가족으로써 먼저 간 남편 대신이라는 생각과 조금이라도 젊고 정정할 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을 거들고 싶었던 그는 ‘보비스’라는 이름이 붙기도 전부터 섬김이 생활을 시작해 어르신들을 모셨다.

그는 단순히 어르신들을 돌보는 역할에만 그치지 않고, 대화와 소통 그리고 주변에 대한 관심으로 재가복지가 필요한 어르신들을 직접 발굴해 보훈처에 추천하고, 그분들이 재가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조치하며 명실상부 섬김이의 맏언니, 왕언니 역할을 도맡았다.

그런 그도 재가복지를 맡았던 어르신이 처음 돌아가셨을 때, 북받치는 슬픈 감정과 죄책감을 주체할 수 없어 한동안 울었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젊은 시절을 조국을 위해 희생한 힘없고 약한 어르신들의 마지막을 돌보며 그는 ‘생의 끝자락’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준비하게 됐고, 편안한 마음으로 어르신을 모실 수 있게 됐다.

그때의 깨달음은 지난해 자신이 큰 수술을 받을 때도 상당한 도움이 됐다. 어떤 날, 손이 저리고 떨리는 것을 방치했다가 3개월 후 아산의 한 어르신 댁을 방문하는 길에 쓰러져 뇌종양 수술을 받은 것. 죽음을 문턱에 두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절망감이 찾아왔으나 그는 섬김이 생활을 하며 어르신들께 얻은 깨달음으로 버텨냈다.

“생사를 오가는 수술 앞에서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어르신들로부터 받은 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섬김이 업무에 복귀했을 때 ‘살아서 나 다시 만나러 와 줘서 고마워’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때문에 ‘살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수술로 자리를 비우는 몇 달간 그가 아니면 안 된다며 꼭 그를 기다리겠다고 대체 섬김이도 마다한 채 그의 안부를 살피며 걱정해준 덕에 성공적으로 수술이 끝난 것 같다고 웃는다.

정년을 앞둔 지금, 그의 보살핌을 받는 어르신들도 그도 모두 이별 앞에 걱정이 앞선다. 얼마 남진 않았지만 이별 대신 더 성심성의껏 어르신을 모셔야겠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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