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민족대표들이 발표한 3·1독립선언서.

1919년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해였다. 3·1운동이 일어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한 해이기 때문이다.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헌법 전문에 들어 있는 역사적 사건은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4·19’의 셋 밖에 없다. 그만큼 3·1운동과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한민국은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상징되는 독립운동의 기반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 헌법정신의 핵심이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민국 곧 민주공화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10년 강제병합 당시만 해도 황제가 유일한 주권자이던 대한제국이 불과 9년 뒤에 국민이 주권자인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독립운동은 일제 식민통치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그에 뒤이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의 수립뿐만 아니라 국민주권주의의 실현, 곧 민주혁명을 지향했다. 독립을 이룬 뒤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자고 생각한 독립운동가는 거의 없었다.

1919년 이후에는 일부 복벽주의의 흐름도 사라져 민주공화제 지향이 독립운동의 주된 흐름이 되었다. 그러한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꾼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4년에 마지막으로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때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서문에는 ‘삼일대혁명’이라는 다섯 글자가 분명히 적혀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3·1운동을 프랑스‘대’혁명에 비견되는 혁명적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 서울 종로 대한문 앞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는 사람들.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이어지다

▲ 1919년 최초로 마련된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1919년 3월과 4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독립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민주공화제를 지향하는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동반했다.

흔히 3·1운동은 원인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포함한 ‘임시정부’ 수립 운동은 인과관계로 엮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1운동이 원인이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면 불과 40일 남짓한 짧은 기간에 어떻게 외형상 정부와 의회를 갖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남의 땅인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시킬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3·1운동은 계기였을 뿐 원인은 아니었다. 이전부터 이루어져 오던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만세시위를 계기로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나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의 경우 만세시위에 앞서 이미 ‘임시정부’를 수립한 바 있다. 3월 1일보다 며칠 앞선 2월 25일의 일이다. 그리고 만세시위가 시작된 직후인 3월 2일 천도교측에서 제작 배포한 <조선독립신문> 2호에는 ‘근일 중에 가(假)정부를 조직하고 가(假)대통령선거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여기서 가(假)정부는 ‘임시정부’를 뜻한다. 따라서 3월 2일 이전에 이미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과는 별도로 13도 대표자 독립대회가 추진되고 있었다. 이 독립대회야말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것이었다. 한성정부 수립운동이 그것이다.

▲ 여성들의 독립 만세시위운동.

3월 초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13도 대표자회의는 4월 2일 열렸다. 참석자들은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가정부를 만들 것”을 결정했다. 한성정부 외에도 국내에서 ‘신한민국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 등 다양한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들이 모두 민국을 표방했다는 데서 이미 국민주권을 바탕으로 한 민주공화제 인식이 상당히 폭넓게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으로 확고해진 주권재민의 이념은 그 뒤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이로써 처음으로 국민과 평등과 자유를 보장하는 주권재민의 근대 국민국가가 출범했다.

1919년 4월 제정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제 국가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동시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통신·주소이전·신체·소유의 자유를 누리는 한편 남녀·귀천·빈부의 차이 없이 일체 평등하다고도 규정함으로써 자유·민주·평등을 대한민국의 핵심가치로 설정했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정치이념이 널리 확산되었고 민국이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1919년은 민족혁명에서 분수령이 되는 해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국민국가를 이루려는 민주혁명의 원년이기도 했다.

▲ 연해주 3·1운동기념식.

 

헌법에는 독립운동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현행 헌법의 모태는 1948년에 제정된 제헌헌법이다. 그런데 제헌헌법의 체제와 내용은 19세기 말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다양한 국가건설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구상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포함한 독립운동 세력의 건국구상이 해방정국기의 정치지형에도 영향을 미쳤고 다시 그 영향 아래 독립운동의 지향성을 담은 제헌헌법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제헌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적혀 있다. 제헌헌법을 만든 입법자들은 대한민국이 이미 건립된 대한민국 곧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건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제헌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출범한 지 올해는 99년이 되는 셈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은 일제타도와 민족해방이라는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예외 없이 다른 세력과의 연대와 통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각 세력의 국가건설론은 서로 수렴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비롯해 각 독립운동 세력이 밝힌 국가건설 구상은 거의 비슷했다. 민주공화제 국가를 만들어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데 대해서는 모든 독립운동 세력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제헌헌법과 현행 헌법은 모두 국가의 형태 및 주권의 소유자에 대한 규정을 본문의 가장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제헌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제2조(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현행 헌법 제1조 제1항(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과 제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 대한민국 헌법의 출발점이다. 헌법상 국민은 정치적 측면에서 주권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측면에서도 모든 권리를 누리는 주체이다. 당연히 이러한 헌법상의 규정은 독립운동 진영에서 1910년대 후반부터 제기하기 시작한, 그리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거쳐 1930년대 중반 이후 각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 움직임 과정에서 확고하게 정착된 민주공화제 구상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 일제의 패망과 광복으로 환국을 준비하며 기념사진을 찍은

충칭에서의 마지막 임시정부 요인들 모습(45.11.3).

실제로 임시정부의 첫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1919)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 1919년 9월에 출범한 통합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헌법 제1조(대한민국은 대한 인민으로 조직한다)와 제2조(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 인민 전체에 있다)는 제헌헌법이나 현행 헌법의 조항과 거의 같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현행 헌법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제헌헌법은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세력으로부터의 유산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독립운동에서 이루려고 한, 그리하여 첫 총선에서 선출된 입법자들이 제헌헌법에서 구체화하려고 한, 모든 사람 아니 최소한 더 많은 사람의 자유와 권리와 평등이 보장되는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출범 100주년을 곧 맞이할 우리에게 독립운동이 남긴 숙제일 것이다.

이준식 /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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