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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 자발성, 모두가 주도했고 모두가 동참 … 민주주의·평화·비폭력 정신 빛나다

기사승인 2018.11.01  13: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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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100년 ③ 3월 1일, 탑골공원, 방방곡곡의 만세운동

   
▲ 1919년 3월 대한문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행렬.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참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한국 대표를 급파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종교계와 학생들이 독립운동 준비에 나섰다. 때마침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서울은 3·1운동을 잉태한 곳이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을 아울러 민족대표를 꾸렸고 경향각지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독립시위를 준비했다.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됐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다.

반면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 소식을 알렸다. 곧 헌병과 경찰에 체포됐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운집한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서울 시내는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

3월 1일에 서울에서만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평양·진남포·안주(평남), 선천·의주(평북)·원산(함남) 등 6개 도시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였다.

평양에서는 오후 1시에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나와 연합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에 감리교와 감리교계 학교 교사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천도교인과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안주에서 오후 5시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기독교 청년지도자들이 주도했다. 선천에서는 장로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정오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로 나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천도교인들도 가담했다. 의주에서는 오후 2시 30분에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천도교인이 연대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원산에서는 오후 2시에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연대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했다.

 

   
▲ 1919년 9월 11일 확정된 대한민국 임시헌법 전문. 모든 조항에 대한민국을 분명하게 못박았다.

이처럼 서울을 포함해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들은 연대의 힘을 여실히 보여줬다. 7군데 모두 철도역을 갖춘 도시로서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날 혹은 당일 날 전달받아 낭독했다.

 

전국에서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나다

3월 1일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날부터 인근지역으로 확산돼갔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간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70%를 웃도는 197회가 북부지방에서 일어났다.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다. 3월 하순에 다시 북부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의 절정기를 이뤘다. 매일 50~60여 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 재일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
   

▲ 통합임시정부를 이뤄낸 제6회 임시의정원

의원과 안창호(1919년 9월).

 

 

 

 

 

만세시위의 양상은 도시와 농촌이 달랐다. 3·1운동은 도시에서 시작돼 농촌으로 번져갔다. 도시에서는 종교인과 학생들이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시위를 모의하고 주도했으며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동참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는 철시투쟁을 벌였다. 농촌 시위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번화한 거리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됐고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옛날부터 농민항쟁에 자주 등장한 횃불시위, 봉화시위도 일어났다.

이처럼 3·1운동은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위를 주도했고 동참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자발성은 폭발적이었다. 구세력인 유림, 식민통치에 협조하던 면장·구장과 같은 관리는 물론 청소년들까지 누구든 조직하고 참여하는 자발성, 그것이 3·1운동이 전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게 만든 힘이었다.

 

   
▲ 시위 중 체포돼 압송되고 있는 시민들의 모습.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다

조선총독부는 만세시위의 확산 원인을 ‘선동적 문서의 배부’에서 찾았다. 학교나 교회에 비치한 등사기로 등사한 각종 유인물과 격문, 그리고 신문 등은 3·1운동을 확산하는 촉매제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 뿌려진 ‘조선독립신문’의 영향으로 전국 곳곳에서 지하신문이 발간됐다. 지하신문은 만세시위 소식을 방방곡곡에 알려주는 배달부 역할을 했다. 지하신문과 함께 간단한 구호를 적은 전단 낙서 포스터, 시위계획이나 투쟁방침을 알리는 격문 사발통문, 관리의 사퇴나 일본인의 퇴거를 요구하는 경고문 협박문 등의 유인물들이 사람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3·1운동 당시 시위 현장에 태극기와 애국가가 등장했다. 시위 현장에는 다양한 깃발이 등장했는데, 태극기를 가장 많이 흔들었다. 태극기는 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작했다. 학생 이외에도 여성 노동자, 기생, 농민, 청년 등 다양한 계층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시위현장에서만 태극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면사무소에 일장기 대신 태극기를 걸기도 했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거는 마을이 등장했다. 만세시위에는 새로운 운동가도 등장했다. 대한제국이 망한 이후 숨죽이며 부르던 애국가도 만세시위에서는 당당하게 제창되었다. 3·1운동 과정을 거치면서 애국가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 독립운동의 역사적 현장에서

올해 3·1절 기념식이 열리고 있다.

   

▲ 3월 1일 오후, 99년 전 독립선언문이 뿌려졌던

탑골공원에서 초등학생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이처럼, 3·1운동을 통해 새로운 시위문화가 탄생하고 있었다. 신문과 각종 유인물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은 만세시위를 널리 알렸다. 시위대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나라 상실의 고통을 절감했고 독립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

3·1운동은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의 정신이 빛난 독립운동이었다.

첫째, 3·1운동은 민족마다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것은 정당한 권리이므로 마땅히 독립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른 저항운동이었다.

‘2·8독립선언서’는 일본의 식민 지배가 ‘무단전제이자 부정하고 불평등한 정치’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 집회결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고, 종교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를 구속했으며 행정·사법·경찰 등 모든 통치기관이 개인의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1919년 3월 17일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이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서’는 일본을 민주주의의 공적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세계의 모든 민주주의자는 독립투쟁에 나선 ‘우리 편’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독립운동은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싸우는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내용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반포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미친 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둘째, 3·1운동은 세계를 향해 한국의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도 세계 평화는 없다고 외쳤다. 당시 한국 독립이 곧 평화의 실현이라는 평화담론이 광범히 퍼져 있었다. 대한국민의회가 3월 20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는 ‘동양의 평화는 한국의 자주 독립에 있다’라고 단언했다. ‘기미독립선언서’도 2,000만 한국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면 ‘동양의 영구한 평화’는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셋째, 3·1운동은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했다. 3·1운동을 모의한 종교계는 ‘기미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의 하나로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광명정대하게 하라’고 해 비폭력의 원칙을 제시했다. 비폭력 평화의 정신을 상징하는 직접행동이 바로 만세시위였다. 3·1운동은 두 달 넘게 이어진 반일투쟁이었지만, 시위대에 의해 죽은 일본 민간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3·1운동으로 빛났던 민주주의, 평화, 비폭력의 정신은 독립운동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3·1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활약했던 학생, 청년, 노동자, 농민, 여성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며 대중운동을 펼쳤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김정인 / 춘천교대 교수

 

나라사랑신문 news@narasara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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