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를 앞두고 신대순 어르신 댁을 찾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군춘희 섬김이.

동지를 며칠 앞둔 햇빛 가득한 오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사이에 두고 대화중인 신대순 어르신(91) 댁에 들어섰다.

“날이 추워서 조금 일찍 준비해 봤지요. 호호.” 홀로 계시는 어르신을 위해 동지 팥죽까지 챙기는 마음 따뜻한 권춘희 섬김이다.

섬김이로 활동한지 이제 5년째로 접어든다는 권 섬김이는 ‘초보 섬김이’답지 않게 어르신과 대화도 어색하지 않고, 필요한 일들을 자연스럽게 척척 챙겼다. 알고 보니 그는 지역, 재향군인회, 임시보호소, 복지관 등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해 온 지 20년 가까이 됐다고.

“제일 처음으로 나간 곳은 아이들이 입양되기 전 머무르는 임시보호소였어요. 아이들을 씻기는 목욕봉사로 시작했습니다. 그때 누군가를 돕는 일이 내게 운명 같은 것이라고 느꼈어요. 삶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복지관 무료급식소도 나가고 지역 문화원에도 나가면서 보람을 찾았죠.”

유공자 섬김이로 진화한 ‘봉사’

그의 봉사활동 리스트에는 ‘재향군인회’도 포함돼 있었다. 지역 재향군인회와 인연이 닿아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돕는 일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러던 중 친구의 추천으로 ‘섬김이’ 활동에 지원하게 됐고, 그는 이제 온전히 보훈가족 어르신들을 위한 ‘섬김이’로 적을 옮겼다.

재향군인회에서 많이 듣고 배웠기 때문에 국가유공자 어르신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베테랑보다 더 익숙한 손길로 어르신을 돌보고, 말벗을 해드리는 데도 금세 적응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미용사 자격증,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구비한 ‘전문가’인데, 모두 그저 봉사활동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고 한다.

미용사 자격증 취득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어르신들 염색이나 파마 같은 소소한 도움을 드리는데 이만큼 효자가 없다. 까만 머리가 젊어 보인다며 좋아하실 때는 보람이 그만큼 커졌다.

“섬김이 활동을 시작할 때 걱정 반, 설렘 반이었는데 어르신들이 모두 부모님 같으시고, 저를 그만큼 예뻐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어르신들껜 배울 점도 많고, 존경할 부분도 많아 저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죠. 국가유공자를 모신다는 자부심도 생기고, 보람도 찾고…. 이분들을 만난 건 신의 한 수 같아요.”

그는 오랜 봉사활동으로 얻은 인맥과 정보의 힘을 적극 활용해 어르신들께 좋은 병원을 소개하고, 지역의 다양한 행사와 연결해드리는 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다. 뭐라도 도울 수 있는 역할을 자신이 할 수 있어서 뿌듯하다고 말하는 그다.

그런 그가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미망인 어르신 얘기를 꺼냈다. 우울증을 오래 앓으셨던 터라 바깥출입도 뜸하고, 끼니도 아무렇게나 챙기는 작은 체구의 어르신께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갔단다. 일본에서 공부하신 어르신과 더 친밀하게 소통하고 싶어서 방통대 일본어과에 등록하기도 했다. 어릴 때 배운 일본어로 대화하는 것이 익숙한 어르신에게 그의 존재는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함께 공부하며 소통하는 즐거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보고 싶다고 말씀하시고, 나중에 함께 일본으로 여행가자며 그렇게 좋아하시던 어르신이 갑자기 돌아가셨을 땐 마음이 아픈 것은 물론이고, 더 많이 뵐 걸, 더 자주 통화할 걸, 하는 반성을 하게 되더라고요.”

미망인 어르신과의 소통을 위해 배우고 있는 일본어는 의외로 다른 곳에서도 도움이 됐다. 섬김이 활동 시작과 함께 5년 째 그가 모시고 있는 신 어르신 역시 일본어에 능통해 일본어로 된 책을 읽곤 했는데, 그가 일본어를 배운다는 사실을 알고 같이 책 구절을 번역하거나, 일본어 회화시간을 가지면서 새로운 낙을 찾기도 했다.

“느지막한 나이에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다니 얼마나 기특하고 좋아요. 우리 집을 들여다 봐주는 것도 싹싹하니 고맙기 이를 데 없는데, 공부까지 하며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인생 선배로써도 보기 좋아서 저도 잘 공부시켜주고 있습니다. 허허.”

어느새 팥죽 한 그릇이 깨끗이 비워졌다. 추운 겨울 따뜻한 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족과 진배없다. 비워진 팥죽 그릇에는 서로를 향한 염려와 걱정과 안위를 보살피는 다른 따뜻함이 가득 채워지고 있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