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늘, 100년이 지난 오늘. 3·1운동 100년은 서울에 어떻게 남아있을까. 한 세기를 넘어 당시의 함성과 열기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흔적으로 새겨져 있을까. 100년을 거슬러 서울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의 현장을 찾았다. 군데군데 돌 하나로, 기념 설명 한 장으로 남았지만 그날의 열기를 담은 뚜렷한 현장은 다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가슴으로 고스란히 이어져 오고 있다.


100주년을 1주일여 남긴 서울은, 아직 남은 겨울 추위가 거리 곳곳에 흩날리고 있었다. 100년 전 오늘이라면, 조금 더 추웠으리라. 홑겹 옷이라서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온 바람이 살을 떨리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100년 전 오늘은,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뜨거웠으리라. 얼마 만에 불러보는 ‘대한’이고 얼마 만에 외쳐보는 ‘조선’인가. 목청껏, 눈치 보지 않은 함성은 하늘을 울렸을 것이다. 그렇게 하늘도 감동하듯 사람들은 거리로, 거리로 밀려 나왔다. 해방된 조국은 바로 이 거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 태화관 터
인사동 사거리에서 종로 방향으로 걷다 만나는 이곳은 3·1운동의 불을 붙인 역사적인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이다.

당시 명월관 지점 태화관이었던 이곳에서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28명의 대표가 참석해 대한독립을 알리는 식을 갖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 장소는 이후 남감리교회가 매수해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활용했지만, 일제가 징발해 흔적을 지워버리려 했다. 한국 감리교회는 해방 후 다시 이곳을 확보해 사회사업 센터로 활용하면서 현장을 보존해 오고 있다.

지금은 건물 앞의 표지석 하나로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이나, 서울시가 오는 8월 광복절에 맞춰 ‘3·1독립선언광장’으로 조성해 개방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 가회동 손병희 선생 집터
삼일대로(한남대교-안국역)가 끝난 지점에서 바로 올라서면 현재의 헌법재판소를 지나 북촌박물관 옆이 손병희 선생 집터이다.

선생의 집터는 현재 표지석 하나로, 배경도 박물관 건물 하나를 등지고 서있다. 1919년 3월 1일의 거사를 하루 앞둔 2월 28일 민족대표 33명이 선언식의 장소와 절차 등을 협의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대저택이었던 이곳은 세월이 흘렀고, 여러 개로 쪼개져 개발되면서 지번을 찾아가며 찾아오는 사람이 아니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흔적이 거의 사라졌다.

 

# 인사동 승동교회
손병희 선생 집터가 33인의 장소라면, 이곳은 학생대표들이 의기를 나누며 간부회의를 가졌던 곳이다. 탑골공원 왼편으로 인사동을 향해 들어가는 초입, 폭 4미터 남짓의 골목길 ‘승동교회’라는 간판을 따라 들어가면 당시 학생대표들이 만세운동을 숙의했던 현장이 나온다.

거사일 10여일 전인 2월 20일 승동교회 1층 밀실에 모인 학생대표들은 현장조직과 선언서 배포 등을 검토했다. 표지석 오른편으로 보이는 건물 한편이 당시 회의실이다. 현재는 승동역사관으로, 당시의 자료들을 교회 이력과 함께 보관하고 있다.

당시 학생대표들은 23일 회의에서 논의 끝에 자체 작성했던 독립선언서를 소각키로 하는 한편, 민족대표 33인의 3·1독립선언서를 다시 확보해, 선언일 하루 전 각자의 품에 안은 채 흩어져 갔다.

 

# 탑골공원
3·1독립운동의 진원지는 탑골공원이다. 3·1독립선언서는 갑작스런 장소 변경으로 태화관에서 낭독됐지만, 시민 학생이 주력이었던 1,000여 명은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태화관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30분 후 이곳으로 전달됐고, 학생대표가 이를 낭독하자 갑자기 ‘대한독립 만세’라는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함성과 함께 시민들은 종로와 동대문 방향으로 행진하면서 시위는 해일처럼 번져갔다.

이날 전국에서 올라온 인사들은 독립선언서를 들고 내려가 재배포하면서 독립선언의 불길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삼일대로의 주축인 탑골공원은 주출입구 우측에 독립선언문과 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형상을 담은 동상을 세워 뚜렷하게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 보성사 터
3·1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터는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

30평 정도의 건물로 당시 보성학교 구내에 있었던 보성사는 당시 소유주였던 손병희 선생의 특명으로 27일 족보책으로 위장한 채 독립선언서 3만여 매를 인쇄했다.

만세 후 일경에 의해 즉각 폐쇄된 보성사는 그해 6월 28일 강제 소각된 이후 오늘날까지 터만 남아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는 1999년 조계사옆 작은 공터에 독립선언서를 치켜든 3인의 군상과 선언서 전문을 새겨 넣은 조형물로 보성사의 뜻을 세워놓고 있다.

 

# 정동제일교회
만세 운동의 광장이었던 오늘날의 시청 앞과 대한문을 돌아서면 만나는 곳 정동제일교회.

이곳은 당시 이필주 담임목사(33인 대표에 서명)의 사택에서 학생대표와 기독교대표들이 회합을 했던 곳이다. 2월 25일, 26일, 학생대표들의 독립운동 참여방안을 논의했고 28일에는 독립선언서 배포와 관련한 모임이 있었다. 특히 이곳은 기독교 측 민족대표 16인을 논의해 인선을 확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도심의 유서 깊은 교회인 정동제일교회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돼 있다. 이곳은 주말은 물론 평일 점심시간에도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여유공간이지만, 그 바닥엔 당시 운동의 산파역을 한 기운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 보신각 대한문 한국은행 광장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3월 1일 가장 크게 터져 나왔던 곳은 ‘광장’이다.

이곳에는 3·1운동 기념 표석이 각각 설치돼 있으나, 자세히 찾지 않으면 발견이 쉽지 않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인파는 광화문을 향해 가다 보신각으로, 다시 대한문 앞으로, 보신각에서 꺾어진 인파들은 오늘의 한국은행 본점 앞으로 물밀 듯 흘러갔다. 그렇게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하늘이 울리도록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늘날 보신각은 국가 중요 기념일의 타종으로, 대한문은 서울광장을 포함한 여론의 광장으로 거듭났으며, 한국은행 앞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경제의 동맥역할을 하고 있다.

3·1독립운동 100년이 지난 오늘, 세계 중심국가로 비약하고 있는 서울은 아직도 그날의 함성을 잊지 않고 있다. 당시의 숨결은 곳곳에서 실핏줄처럼 흐르며 오늘의 현실과 후손들을 만나고 있다. 그 뜨거웠던 독립과 자유를 향한 의지는 그렇게 후손들의 가슴에 남아, 통일과 대화합의 큰 에너지로 다시 뛰고 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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