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상해 임시정부 청사(1919.4). 통합임시정부를 이뤄낸 제6회 임시의정원 의원과 안창호(1919.9).
한국광복군성립전례식(1940.9.17).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국 기념사진(1945.11.3).

20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꼭 100년 전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분노에 찬 세월을 보내다 3·1독립운동의 힘을 입어 임시정부를 세우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공표한 날이다. 이날 조선은 왕의 나라, 제국, 식민국을 벗어던지고 국민의 나라, ‘공화국’이 출발했음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국민주권의, ‘민주의 나라’가 한반도에 세워졌음을 세계만방에 알린 것이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100년 역사의 순간들을 다시 기억한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

치욕의 시간을 박차고 일어난 3월 1일. 탑골공원을 비롯한 서울 시내 일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주권을 빼앗긴, 나라 없는 설움을 보기 좋게 날려버린 운동은 이제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42일째 되는 날, 4월 11일의 날이 밝았다. 3·1독립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독립선언서’에서 밝힌 대로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 것이다. 민주공화제를 정치체제로 선택한 이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다. 우리 땅, 우리 국민 모두가 참여하지 못한 상황이라 부득이 ‘임시정부’가 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렇게 첫 걸음을 내디뎠다.

전날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회의를 계속한 독립운동가들은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의 관제를 결정하고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를 선출함으로써 정부 구성을 완료했다.

이렇게 출범한 임시정부는 1945년 해방으로 환국할 때까지 27년간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고난과 역경을 견뎌가며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중심기관 역할을 하게 됐다.

9월 11일, 통합 정부의 출범

3·1독립운동의 기운이 해외로 퍼져나가면서 큰 움직임은 임시정부 성립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독립운동의 전초기지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이전에 먼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독립선언과 함께 정부안을 발표했다. 이어 국내에서는 ‘한성정부’안이 성립했다. 그리고 4월 11일, 상하이에서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지도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안창호가 나섰다. 다소의 진통 끝에 한정정부안의 정부, 상하이의 임시의정원과 러령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면서 명분과 실리를 갖춰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5개월만인 9월 11일의 일이었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외교전

상하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두 갈래로 진행됐다. 파리강화회의를 비롯한 국제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일과 중국 등 여러 나라에 정부 승인을 얻는 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강화회의가 파리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시정부로서는 일제의 부당한 침략과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임시정부는 신한청년당 대표로 1919년 3월 13일에 파리에 도착해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활동하던 김규식을 전권대표로 추인했다.

5월에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를 비롯한 위원들과 각국 정부에게 보낸 공고서에는 ‘한일합방조약’의 폐지와 대한민국의 승인 등을 요구하는 20개 항목을 담았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제기하고, 한국에 동정여론을 형성하는 큰 흐름의 변화를 가져오는 등의 성과로 남았다. 임시정부는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서도 한국문제 상정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중국정부의 승인을 얻기 위한 임시정부의 움직임도 계속됐다. 임시정부 소재지인 만큼 중국의 협조와 양해는 무엇보다 필요로 한 상황이었다. 1921년 10월 외무총장 신규식은 호법정부의 쑨원을 방문해 국서를 봉정하고 임정에 대한 승인을 요청했다. 이 자리에서 상대정부에 대한 쌍방 승인이 이뤄졌다.

한편 국무총리 이동휘의 러시아 승인 요청과, 워싱턴에 설치된 구미위원회의 대미외교 등을 통해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이 같은 노력은 훗날 임시정부가 ‘한국의 자유 독립’을 국제적으로 확약 받은 1943년 11월 카이로선언을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

강한 군사를 키운 임시정부

임시정부의 활동에는 열강을 대상으로 한 외교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임시정부 초기 만주와 러령 지역의 무장 독립론자들은 임시정부를 국경지역 만주나 연해주에 둘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야 효율적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우리 민족의 대표기관이자 주권기관이며 독립운동 지도기관이라는 자부심으로, 국내외 동포들과 연락하며 통솔하고, 민족교육도 하고, 독립 외교도 펴고, 독립군단도 원격 지휘할 수 있는 곳 상하이를 임시정부로 정했다. 초기부터 군사활동은 계획대로 활발하게 이어졌다. 본격적인 군사활동은 국무총리 이동휘와 군무총장 노백린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등 세 가지 군사 관련 법령을 제정한데 이어 그 해 말 상하이에 임시정부의 육군사관학교인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했고 다음해에는 간호원양성소를 통한 간호병 배출에도 힘썼다. 이어 군무총장 노백린에 의한 비행사 양성소 설립, 타 지역 독립군과의 연계 등으로 군사양성 노력은 계속됐다. 이 노력은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

청산리 대첩, 독립투쟁의 깃발

통합 임시정부의 무장투쟁론자인 이동휘는 만주의 독립군 단체와 긴밀히 연대해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의 힘을 받은 만주지역의 독립군 단체들은 군사훈련과 무기 구입 등을 통해 전투 역량을 강화하면서 국내 진공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간 독립군이 수행한 국내 진공작전은 총 24회에 달한다. 임시정부 군무부가 파악한 자료로는 1920년 3월부터 6월 초까지 독립군이 전개한 국내 진공작전을 총 32회였다.

무장투쟁의 백미는 청산리 대첩이다. 그에 앞서 있었던 1920년 6월의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 전투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표적인 승전이다. 자존심이 상한 일제는 소위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만주지역의 동포사회를 말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 청산리 대첩이 있다.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은 청산리 전투에서 일군 연대장 1인과 대대장 2인을 포함해 1,254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과를 거뒀다고 보고했다. 임시정부는 청산리대첩에 대한 선전활동과 함께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해갔다. 그 방략은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법 ‘독립전쟁’이었다.

결국 청산리 대첩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절대 독립, 완전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독립전쟁론으로 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 무장투쟁을 한국독립운동에서 최고 가치로 세운 계기가 됐다.

고난의 대장정,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의열투쟁과 함께 일제와 대결한 전투들은 국제사회에 임시정부의 독립을 향한 강한 의지를 널리 알렸고, 이는 한편으로 독립운동 전반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집요한 조직과 요인에 대한 추격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임시정부는 고난의 대장정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윤봉길 의거 당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경리4호 청사에 들이닥친 일경은 요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가 서울로 압송됐고 김구 등 요인들은 끝없는 유랑을 하게 됐다.

임정과 김구는 각각 방향을 달리해 조직을 보호하기로 하고 상하이와 항저우 사이의 작은 마을 가릉으로 피신했다. 임정도 1932년 5월 긴급히 항저우로 피신했다. 서호 호숫가 호변촌에 청사를 마련했으나 이 과정에서 당시 책임자였던 김철은 급성폐렴으로 순국하게 된다.

다시 항저우(杭州)를 떠난 임시정부는 자싱(嘉興),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基江) 등을 거쳐 1940년 9월 충칭으로 피신을 거듭했다. 충칭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했던 임정은 4년여가 지난 1945년 1월에야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인 연화지(蓮花池) 38호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청사는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맞이하고, 그해 11월 환국까지 임시정부로 지켜낸 마지막 청사로 기록됐다.

충칭시대와 광복군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전략은 국군을 창설해 중일전쟁이나 러일전쟁이 일어나면 연합작전을 벌여 일본을 공격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창설 계획은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7월 유동열·이청천·김학규·이복원 등을 중심으로 군사위원회를 발족한데서 출발한다. 1939년 기강에서는 11월 국무회의에서 ‘독립운동방략’을 결정하면서 광복군 창설을 공식 추진했다.

이날 회의는 “임시정부의 활동능력과 전투력은 반드시 조직적으로 훈련받은 무장독립군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며 “일제와 직접적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광복을 완성한다”고 해 무장부대 편성과 독립전쟁 수행을 군사활동의 목표로 정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5월 광복군 편성 계획서인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을 중국정부에 제출하고 광복군 편성에 대한 인준과 재정 원조를 요청했다. 독립적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부정적 입장을 확인했지만 임시정부는 자력으로 광복군을 창설을 추진했다.

드디어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한데 이어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했다. 광복군이 임시정부의 국군이라는 것을 명문화하기 위해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주석 직할 하에 뒀고 통수권은 임시정부 주석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다.

광복군은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편입하면서 대폭 편제를 개편하면서 모병과 일본군 내의 탈출 한인 병사 영입 등을 통해 그 세를 키워갔다. 이렇게 1945년 6월 다시 총사령부와 단위부대로 3개 지대를 갖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광복 5년을 앞두고 충칭에서 성립된 한국광복군 창설은 대일선전포고 발표, 대한민국건국강령 선포로 이어지면서 광복의 날을 맞게 됐다.

대한민국 건국강령, 그리고 광복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임시정부는 이제 광복 후 정식으로 수립할 새 국가의 청사진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반포했다. 1941년 11월 28일 국무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건국강령은 ‘임시’ 정부를 넘어선 정식 국가와 정부를 위한 기본 설계도인 것이다.

임시정부는 10여년 전 1931년 4월 조소앙이 기초하여 발표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언’을 통해 광복 후 세울 정식 국가의 큰 틀을 밝힌 바 있다. 여기에는 임시정부가 광복 후 건설할 새 국가의 목표는 특권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균등(均等)사회를 실현한다는 것이 담겨있다.

1941년의 대한민국건국강령은 제1장 총강 7개항, 제2장 복국(復國) 10개항, 제3장 건국(建國) 7개항, 모두 3장 24개항으로 구성됐다.

제1장 총강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정신과 ‘토지국유제’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해 “혁명적 삼균제도로서 복국과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 공리인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의 3종 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을 천명했다. 그리고 민족혁명은 복국-건국-치국의 3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세계일가의 인류평화를 지향한다고 밝혔다.

제2장의 복국(復國)은 국토를 수복하고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단계까지 추진할 구체적 실천 강령으로 규정했다. 제3장의 건국에서는 삼균제도의 헌법을 채택해 삼균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취해야 할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대한민국건국강령의 기본 이념은 ‘홍익인간’의 건국사상과 토지 국유제의 역사적 전통에서 삼균주의의 근원을 찾았다.

결국 삼균주의에 토대를 둔 대한민국건국강령은 좌우 이념대립을 지양하며 시종일관 대동단결을 추구해온 독립운동세력의 통합 정신과 의지가 오롯이 담겼다. 바로 이것이 곧 이어 성립한 좌우 무장부대의 통합과 의회의 통일과 연합정부의 출범을 가능케 한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이다.

자료협조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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