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떠나시는 것을 예감했을까. 어머니가 가시던 날, 매화나무에는 붉은 꽃망울이 눈물방울처럼 매달려있었다. 터질 듯한 꽃망울로 어머니를 배웅하던 매화나무에 연녹색의 잎새가 무성한 것을 보니 생을 이끄는 것은 시간인 것 같다.

어머니는 잔정 없고 무뚝뚝하던 아버님이 떠나신 후 몇 년은 사람 사는 것처럼 사셨다. 구질구질하던 젊은 날에 보상이라도 해주듯 시장에 가서 연분홍색 스웨터도 사고 몸빼 아닌 정장 바지도 사들였다. 박꽃처럼 하얀 얼굴에 크림을 찍어 바르고 연분홍색 립스틱으로 꽃잎 같은 입술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를 누려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머니가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들의 부재를 확인한 어머니는 정신을 놓았다.

어머니는 가장 믿고 의지했던 큰아들마저 떠나보내고 나서 탈출구가 필요했던 것 같다.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쩍 잠이 없어진 어머니는 밤을 낮처럼 불을 밝혀놓고 낮과 밤의 사잇길을 통해 바람같이 지나가버린 과거를 용케도 들추어냈다.

치매는 영혼이 맑은 사람한테 오는 것 같다. 치매는 번뇌와 욕심을 접고 스스로 꽃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세상이다. 평생 마음고생하고 살았으니 남은 생은 마음이 가는 대로 살라고 주는 신의 선물 같다.

어머니는 치매가 꽃처럼 왔다. 박꽃같이 하얀 얼굴이 달뜨듯 붉어졌다. 아버님 그늘에서 큰소리 한 번 못 치고 살던 것이 한이 되었던 어머니는 헤실헤실 웃으며 마음속에 있는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냈다. 늘 웃고 손뼉 치고 노래도 곧잘 불렀다. 생의 마지막 구간을 걸으며 고통 받는 환자 옆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어머니는 병실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폐렴으로 며칠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그리고 임종이 가까워졌다. 남편과 같이 임종을 지키는데 영원한 부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어머니의 휑한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굴러떨어졌다. 어머니를 닮은 연분홍빛 눈물이었다. 가시면서도 자식 걱정을 하신 것일까. 어머니는 딱 하루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홀연히 떠나셨다.

부재는 그 사람의 존재를 절절하게 증명하는 것처럼 어머니만 빠진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핏줄로 얽힌 관계가 때로는 통증처럼 아프기도 하다.

무엇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 어머니가 떠나고 무심하게 내리쬐던 봄볕도 하얗게 소멸해간다. 고개를 들고 병실을 올려다보니 창문 사이로 어머니가 웃고 계신다. 나는 다시는 못 올 어머니의 저무는 봄날을 내시경을 찍듯 아프게 탁본한다.

박종희 국가유공자인 시부모님과 아버님을 모시고 살아왔다. 2000년 월간문학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그는 세종시에 거주하며 수필창작 강사 등으로 이웃의 글쓰기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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