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주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일투쟁활동 전시관에 전시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안의 여성회원들의 모습. 1938년 결성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중일전쟁에 참전해 부상당한 부상병을 위로하는 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고 식민지로 전락한 엄혹한 정치상황에서 한국여성은 봉건시대와 별반 차이 없이 부수적인 존재로 인식됐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합심 단결해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대 여성들은 조국 광복의 책임을 느끼고 자식에게 자랑스러운 독립국가를 물려주고자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근대의 여명기에 조선의 여성들은 이름도 없이 누구의 딸,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부인으로만 기억됐으나 스스로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사회적 존재로 역사 앞에 당당히 등장했다. 그러나 한국근현대 역사에서 주체적 삶을 살다간 여성의 삶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여전히 역사는 남성을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여성사는 이면에 감춰져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독교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근대적 여성교육이 시작되면서 여성의 의식계몽과 함께 사회참여가 점차 확대돼 여성운동의 대중화에 불을 붙였다. 기독교 복음을 접한 여성들은 복음전파에 투신하는 한편 ‘자기개발'과 ‘인간해방'이라는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됐다.

가난과 성차별, 봉건적 인습을 벗어던지고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미래를 꿈꾸며, 남성과 사회관습에 예속된 약한 존재가 아닌, 개인의 구원을 넘어 나라와 민족 구원에 확신과 사명감을 갖는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919년 간도의 애국부인회가 작성한 대한독립여자선언서. 이 선언서는 부녀자들도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격문 성격이다.

3·1운동과 여성

1910년대 근대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한 여성, 지방의 기독교 여성들과 여학생들은 3개월 이상 전개된 3·1운동의 지방전파와 만세운동에 앞장서서 죽음으로 맞서는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 여학생들은 만세운동의 전열에 나섰고 교사들은 여학생들에게 3·1만세운동 소식을 알리고 함께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기녀들도 삼삼오오 대열을 갖추고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밖에 무명으로 살며 누구씨 혹은 ‘소사’라는 이름의 여성들과 평범한 아낙들도 장날에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일제는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야만적인 성고문과 탄압을 가했다. 감옥에서도 여성들은 불굴의 독립의지를 꺾지 않고 옥중 단식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옥중 투쟁을 지속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는 서울과 평양에서부터 시작해 전국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1919년 3·1운동을 경험한 이후 여성운동은 일제의 잔혹한 탄압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보다는 분노를 느꼈고 불굴의 용기를 가진 여성들에 의해 국내외 각지에서 애국부인회가 결성됐다. 서울에 본부를 둔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평양에 본부를 둔 대한애국부인회 등 전국에서 애국부인회가 결성됐다.

이들 애국부인회는 3·1운동으로 투옥된 애국지사들과 그 가족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받들고 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일을 했다. 여성들은 자수로 만든 수예품을 판매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3·1운동에 대중성과 민중성을 부여해 준 것은 여성이었다. 이들은 맨몸으로 거리로 뛰쳐나와 일본 헌병의 총칼 앞에 의연히 만세를 부르다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검거됐다. 3·1운동 과정에서 놀랍고 담대한 용기를 보여준 여성들은 일제의 무단통치를 통해 인간해방의 의미를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자유를 위한 투쟁, 민족평등을 이루고 나아가 세계 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르는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했듯이,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 또한 식민지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으며, 경제 수탈과 민족차별에서 벗어나 민족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3·1운동 이후 여성들은 남녀동등의 권리를 요구하기보다 스스로 내면의 의식을 성숙시키고 자아를 발견했다. 서로서로를 일깨우며 실력양성에 매진하는 한편, 나라와 겨레를 구하는 일에 동참했다.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려는 몸부림 속에서 여성들은 점차 애타심(愛他心)만이 아닌 애기심(愛己心)을 갖게 됐고 비로소 ‘희생’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주체의식과 자존감을 가지게 됐다.

이렇게 여성은 국권 상실과 국망의 시기에 대의에 헌신하는 빛나는 존재로 부상했다. 이처럼 식민지시대 한국여성은 고난의 시대를 극복하고 스스로 자유와 민주의 역사를 써나간 역사의 주인공들이 됐다. 여성들은 내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 그 자체를 여성해방운동으로 간주했기에 반제반일의 독립운동에 투신했음을 알 수 있다. 식민지에서 해방하여 독립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일에 참가함으로써 여성의 자유와 평등권을 확보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한인국민회독립의연금 영수증.

해외로 나가 항일전선에 나선 여성들

망국 상황에서 만주 일대, 연해주 일대와 중국과 일본으로 이주하여 낯선 땅에서 도전과 불굴의 정신으로 새 삶을 개척한 여성들은 한국 이민 디아스포라에서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위해 가족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그리고 식민지 현실을 탓하며 실의에 빠져 헛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남성들을 대신해 가정살림과 자녀양육을 책임졌으며 나라와 겨레를 구하는 일에 동참했다.

한편 미주 한인여성의 독립운동은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조화와 협동을 추구하고 공정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고된 이민생활 속에서도 조국을 잊지 않았고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기꺼이 동참하며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다. 자주독립국가 건설의 비전을 잃고 정치적인 주도권 다툼에 몰두하는 남성에게서 이룩할 수 없는 상부상조의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사의 수준과 지평을 넓혀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국여자광복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축으로 상하이 대한여자애국단과 국내의 대한민국여자애국단, 그리고 미주 여성들의 대한여자애국단은 공히 임시정부 지원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역할로 간주하고 독립의연모금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미주의 대한애국부인회 회원들은 상하이 대한여자애국단과 연락했으며 국내에서 비밀결사로 결성된 대한적십자회와 여자애국단과도 공동의 활동을 펼치며 조직적 연대를 모색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고 이어 만주국을 세우자 한중 공동의 항일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놀라운 담력을 가지고 항일투쟁에 몸을 불사른 수많은 여성 투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여성들이 항일전선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했으나 무명인 채로 남겨져 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 충칭에 안착하기까지 고난의 행군 중에 여성들은 임시정부를 주도한 남성들을 대신해 연로한 정부 요인들을 돌보며 정부의 안살림을 맡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이들의 가족을 지켜주고 서로를 돌보며 임시정부 대가족을 이끌어나갔다.

1938년에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창설돼 대일선무공작활동을 하며 광복군 창설을 준비했고 이들은 후일 광복군 제5지대로 흡수됐다가 나중에 제2지대로 편재됐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에 안착하자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재건에 참여했고 1940년 6월 17일에 한국여성혁명동맹을 창설해 좌우 통합을 위한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오랫동안 염원했던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됐을 때, 임시정부 요인들과 민족혁명당원의 딸들이 광복군이 됐다.

한편 여성들은 충칭 토교 우리촌에서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이 주관하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자녀들의 교육을 맡고 교사가 돼 아이들이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한국말로 강연, 연극, 노래 등 위문공연을 하며 가두선전방송을 펼치고 광복군 창설의 소식을 알리고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조직된 선전대의 선전조를 편성해 선전활동에 나섰다.

특히 여성들은 충칭의 중국방송국에 출현해 중국어와 영어로 일본의 패망이 임박해왔다고 알리는 대적 심리선전방송을 했다. 일본군으로 참전했다가 중국군 포로가 된 한국 국적의 병사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이들 한적 병사를 광복군으로 초모하는 공작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1,000만 한인여성들의 단결을 호소하고 독립을 되찾은 조국에서 남녀평등의 권리와 지위가 보장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을 준비했다.

일제강점 시기 여성독립운동은 조선 현실에서 주체적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들이 스스로 당당한 삶의 주체임을 천명한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국권 침탈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험난한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뛰어든 여성의 구국운동이었다.

한국혁명여성동맹, 1940년.

여성독립운동은 국민이자 시민인 여성이 정당한 국민의식을 갖고 나라를 구하는데 용기 있게 책임감을 가지고 떨쳐 일어선 결단이었다. 그것은 구국운동에는 남성과 여성이 따로 없고 인간해방을 위한 싸움에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가능했다.

결국 3·1운동으로 놀랍고 담대한 용기를 보여줬던 여성들은 이후 일제의 수탈과 차별을 끊어내고 민족의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 광복군을 포함한 모든 요청에 응답하며 민주공화국 건설에 힘 있는 ‘절반의 역할’을 다했다.

이명화 / 도산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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