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칭의 옛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계단에서 3·1독립운동
의 정신을 기리며 국군장병들이 ‘3’과 ‘1’ 모양으로 앉아 기
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국군장병들과 함께 임시정부 4,000km 답사를 다녀왔다.

전국 각지에서 모범적으로 근무하고 있는 국군장병들과 함께 한 ‘임시정부의 주요거점을 따라 선열의 숨결을 느끼는 4박 5일간의 여정’. 짧은 시간이었지만 독립운동이라는 뜨거웠던 과거와 오늘의 호국 현장을 지키는 젊은이들의 만남은 신선한 조합이었다.

*상하이, 그리고 윤봉길 의사

5월 13일 첫날, 도착한 곳은 임시정부가 처음 세워진 상하이였다. 2015년 상하이시와 독립기념관이 협력하여 전시관을 재개관해서인지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윤봉길 의사의 결연함이 살아있는 홍커우공원이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4.29)는 침체기에 있던 임시정부의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으며 독립운동의 대전환점을 가져왔다. 홍커우공원 내에 위치한 매헌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사의 강직한 얼굴을 보다 문득 의거 당시 현장의 윤봉길 의사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의거 당시 나이 25세… 조국의 독립에 이바지한다는 사명감 뒤에 전해져오는 긴장감으로 심장이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새삼 윤봉길 의사 흉상 뒤에 새겨져 있는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글귀가 무겁게 느껴진다.

*가릉, 험난한 피란의 시절

홍커우공원에서의 감흥이 다 식지 않은 상태로 맞이한 탐방 2일차. 김구 선생의 고난의 피난 생활이 시작된 가릉에 도착했다. 우리가 방문한 매만가의 서남호란 호수 옆 남향집은 김구 선생이 기거한 주택으로 가릉시에서는 2000년 김구 선생 피란처를 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고 2005년에는 피란처를 전면 수리 복원하고 절강성 성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항일전쟁기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손을 잡은 한중 양국 간의 깊은 우의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실 내부 김구 선생 피신을 도운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보다가 문득 백범일지에 주애보가 소개됐던 내용이 기억났다. “난징에서 출발할 때 주애보는 본향인 가릉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종종 후회 되는 것은, 송별할 때 여비 100원 밖에 주지 못하였던 것이다. 내가 뒷날을 기약할 수 있을 줄 알고 돈도 넉넉히 돕지 못한 것이 유감천만이다.” 재회를 기약할 수 없었던 김구 선생의 험난한 독립운동의 길이 모든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항저우, 역동의 이동시기

상하이를 떠난 임시정부는 1932년 5월 항저우에 자리를 잡았다. 항저우 두 번째 청사인 호변촌 청사는 2014년 중국 국가급 항전시설로 지정되면서 전시물을 보완해 방문객을 맞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역사적으로 ‘역경의 이동시기’라 불리는 8년 중 항저우시기를 보내며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게 된다. 전시관을 둘러보는 내내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 정부와의 교섭과 함께 일제 정보망을 피하기 위해 난징과 자싱 등 여러 곳으로 흩어지며 활동했던 고단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충칭, 해방의 감격맞이

경사가 겹친 것을 기념하여 정해졌다는 중경의 중국어 명칭은 충칭(重慶)이다. 충칭의 그 의미와도 비슷하게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서 해방의 감격을 맞았다.

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에 들어서니 이전 임시정부청사와는 다른 규모를 느낄 수 있었다. 5동의 건물로 구성된 청사는 정부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고 광복군의 실질적인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는 등 우리 힘으로 해방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3·1운동으로 결집된 우리 민족혼의 결정체인 임시정부, 지치고 힘들었던 오랜 여정을 선열들은 어떻게 견뎌내셨는지 존경심이 절로 생겨나는 듯 했다. 탐방여정을 마치면서 우리 일행은 곳곳에서 자랑스런 선열들을 만났던 일정 하나하나를 ‘새로운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후배들로 다시 태어나는 소중한 시간으로 간직하게 됐다.

배상현 / 국가보훈처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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