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표창 수상 후 이낙연 국무총리와 기념촬영 중인 가문 대표. 
1960년대 후반 광복군 동지들과의 만남.

광복군에서 육해공군까지. 한국광복군을 1대로, 이어 후손 3대까지 7명이 모두 병장 이상의 병역을 이행한 가문이 2019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됐다. 올해 병무청의 병역명문가로 대통령표창을 받은 가문은 한국광복군에 참여했던 박영만 선생(1914~1981) 가문이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였던 광복군에서부터 최근까지 우리 국방의 현장을 지킨 이들은, 특히 2대 4명의 후손이 육군, 해군, 공군에서 각각 병역을 마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 박영만 선생의 차남 박재훈 예비역 해군 대위는 자랑스러운 광복군의 후손으로, 오늘 대한민국을 지킨 국방의 주역으로 자신의 가문을 소개했다.

 

서울 용산에서 만난 그는 국방부 청사와 국방부 소속의 각 군 본부가 있었던 전쟁기념관을 내려다보며 옛 군 복무 시절에 잠시 추억한 후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무래도 광복군 출신인 아버님을 생각하며 자식들이 모두 자신의 병역 생활을 구상했던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도 일찌감치 고등학교 시절부터 해군사관학교 진학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했습니다. 해사 입학을 이루자마자 뜻하지 않게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퇴교해야 했지만, 다시 학사장교로 해군근무를 지원하면서 기어코 해군의 꿈을 이뤄냈지요.”

박재훈 씨는 가문 이야기에 앞서 아버님 이야기를 앞에 내세웠다. 모두 아버님의 후손이며, 그의 정신을 함께 나누고 이어받았다는 뜻에서이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자란 박영만 선생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시작되자 지역학생운동에 참여했다 퇴학을 당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선생은 와세대 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하다 1939년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직후부터 고향에서 일제에 의해 말살 위기에 처한 조선전래동화를 수집하고 출판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1940년 이광수, 최남선 등 친일 문인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제작 살포한 사건으로 일경에 쫓기는 상황이 벌어지자, 중국 망명을 결행하게 된다. 중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임시정부가 있었던 충칭에서 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는 한편 광복군 군가인 ‘압록강 행진곡’을 작사해 광복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꽃포기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린 이 행진곡의 가사에는 선생의 독립을 향한 의지와 광복군의 불꽃 투쟁 열기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아버님은 임시정부 정훈처 선전과에서 활동을 하셨고 이범석 장군을 도와 국내진공을 위한 한미합작군사훈련(OSS)을 실시하도록 주선했습니다. 이후 광복군 총사령부 부령으로 승진, 선전과장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님의 독립투쟁 중에서 일제의 우리 문화 말살정책에 맞서 전래동화를 수집하고 이를 채록하는 작업이 ‘문학을 통한 투쟁’이었으며 이것은 잊혀질 수 없는 아버님 역사의 삶의 한 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은 해방 이후 문인협회 등에 참여,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갔고,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재훈 씨는 이번에 병역명문가로 선정된 것이, 크게 드러내놓고 강요하지는 않으셨지만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광복군 시절의 항일투쟁, 나라사랑 정신이 자연스레 후손들에게 스며들어 국방의 의무 현장에서 충실한 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역시 해군사관학교를 마치진 못했지만 꿈에 그리던 해군 장교로 복무를 마쳤고, 그의 진학에 때맞춰 확장되는 ‘원호장학금’으로 고교와 대학을 거쳐 독립유공자의 아들로 그 정신에 어긋나지 않게 잘 살았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는 이번에 명문가 선정을 위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아버님의 정신’이 우리 후손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라사랑의 DNA’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됐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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