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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골공원에서 만세고개, 아우내장터의 함성까지…전국 곳곳의 만세 독립운동 현장 ‘생생’

기사승인 2019.08.21  16: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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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100년 ⑬독립운동의 현장을 가다(상)

따가운 햇살에 푸른 하늘, 자연과 세상의 선들이 모두 제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2019년 8월. 역사왜곡으로 경제보복으로 도전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대한민국은 굳게 하나가 돼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우리는 다시 100년 전 전국을 흔들었던 만세운동, 그리고 그에 이은 가열찬 항일 독립투쟁을 기억한다. 오늘의 새로운 국민적 응전은 더 커다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희망찬 행진일 것이다. <나라사랑>은 지난 1년간 이어왔던 ‘대한민국 100년’ 기획의 마무리로 2회에 걸쳐 전국의 독립운동 현장취재를 게재한다.

# 독립만세 서울의 함성, 처음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탑골공원> 서울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자리는 탑골공원이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의 첫 낭독은 갑작스런 장소 변경으로 종로 태화관으로 바뀌었지만 만세운동의 중심지는 ‘시민의 힘’을 보여준 이곳 탑골공원이다.

학생대표의 낭독 그리고 이어진 ‘대한독립 만세’ 함성은 이곳을 진원지로 해서 서울시내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종로 일대로, 동대문으로, 한국은행 방향으로 시위는 해일처럼 서울의 거리와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었다.

100년 지난 오늘, 광복절을 사흘 앞둔 탑골공원은 도심 한여름의 햇살과 함께 빛나고 있고, 그날의 자취는 고스란히 도심 숲과 함께 간직하고 있다. 공원 앞을 오가는 차량들과 사람들이 오늘도 제각각 바쁜 길을 달려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늘 일파만파로 번져가는 일본제품 불매운동 등으로 다시 뜨거워지고 있고, 광복절은 벌써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누구에게나 올해의 광복절은 더 특별하고 더 가슴 벅찬 날이다. 올해는 새로운 100년을 향하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백범김구기념관 1층 ‘백범좌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학생들 모습.

<백범김구기념관> 서울역과 서부역을 지나 한강으로 달리다 오른쪽으로 살짝 방향을 돌리면 효창원을 만난다. 일제 강점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백범 김구선생을 포함해 이동녕 선생, 조성환 선생, 차리석 선생,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효창원 경내에는 묘소와 함께 백범김구기념관이 함께 나란히 들어서 있다. 그리 위압적이지 않은 단아한 모습의 기념관은 문이 열리면서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 백범좌상이 후손들을 맞는다. 오늘도 폭염을 뚫고 찾아온 학생 관람객들과 가족단위 관람객들의 숫자가 상당하다. 좌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동행한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학생들의 눈빛이 빛난다.

좌상 주위로 배치된 전시실은 백범의 생애와 사상, 구국운동의 과정, 임시정부와 광복군시절,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노력까지 잘 정리해 두고 있다. 특히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공간에는 상하이에서 충칭까지의 임시정부 이동경로가, 내려오는 공간에는 전국을 다니며 통일국가를 호소했던 그의 여정이 상징적으로 정리돼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임정시기와 해방공간에서 선생과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느낌이 든다.

   
1908년부터 1987년까지 80여 년간 운영되었던 대표적인 수형시설이었던 서울 서대문형무소, 이제는 국민들에게 역사체험의 기회를 제공하는 역사관으로 재탄생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내부를 관람하는 시민들의 모습.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곳은 형극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은 공간이다. 근현대사 우리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상징하는 곳, 이제는 역사관으로 바뀌었지만 고스란히 형무소의 느낌과 아픔이 절절이 살아있다.

광복절을 며칠 앞둔 광장과 옥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우리의 아팠던 현실을 둘러보며 회한에 젖기도 한다.

일제에 의해 1908년 10월 경성감옥으로 문을 연 서대문형무소는 초기 수감인원이 500여 명이었으나 1919년 강제병합 이후에는 의열투쟁과 비밀결사요원 등의 수감이 급격히 늘어나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3,000여 명에 육박하는 독립운동가가 수감되기도 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 낡았지만 형태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과 철창, 고문실 등이 그대로 남아 방문하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유관순 열사가 수감됐던 여옥사, 사형장, 사형 이후 시신을 반출하는 시구문 등은 너무 생생한 모습이다.

역사관은 오늘도 광복절을 맞는 여러 행사준비로 바빴고, 나라꽃 무궁화와 독립운동가 현수막으로 장식된 독립문, 3·1독립운동기념탑의 위용이 8월의 태양을 빛내고 있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중앙에 위치한 조형물.
   
아우내 만세운동 발생지 표지석.

# 천안, 아우내장터의 함성 유관순 열사의 넋과 함께

3월 1일 그날 이후 전국의 모든 장터는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이었으며, 모든 장날은 만세운동의 폭발이 예고된 날이었다.

장터는 만세운동 참가자들에게 가슴 뜨거운 현장이었고, 일경에게는 공포와 긴장의 공간이었다. 그 대표적인 곳, 아우내장터도 마찬가지였다.

충남 천안 병천의 아우내장터는 4월 1일 3,000명의 장꾼들이 만세시위의 주체가 됐다. 오후 1시 대한독립 깃발과 태극기가 중심에 서서 시위가 시작된다. 총검을 들고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망자를 옮기는 과정에서 다시 충돌, 사상자가 늘어나자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우편소 습격하는 등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 주도자 중 한 명인 유관순은 처음 3년형을 받았으나 부당한 재판의 결과를 거부하면서 법정모독죄가 추가돼 7년형을 받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고 만다.

‘아우내독립만세기념비’는 장터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구미산 숲속으로 돌계단 100여 개를 걸어 올라가서야 만날 수 있다. 운동시설의 한편에 선 기념비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가 1947년 11월 26일 장터가 내려 보이는 곳에 세웠다. 세월의 무게를 더하는 듯 검게 변한 비석은 조금은 외롭게 장터의 지킴이처럼 서있다. 비문은 ‘긔미독립운동 때 아내서 일어난 장렬한 자최라’라고 적고 있다.

당시 장터와 일제의 헌병주재소가 있던 자리는 이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으로 변신했다. 3·1운동 90년을 맞아 10년전 조성된 공원은 ‘아우내 만세운동 발생지’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주변으로는 부조로 만세운동 전개과정이 형상화돼 있다. 유관순 열사, 봉화, 군중, 피격된 사람들 등이 당시의 현장을 실감나게 전한다.

아우내장터 인근에는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열사 기념과, 열사의 생가 등이 산재해 있어 이곳이 대표적인 독립운동의 산실임을 증명한다.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

# 화성, 제암리 학살 현장 이제는 조국의 넋이 된 23인

흐린 구름과 따가운 햇살이 오가는 화성 제암리. 이곳은 학살사건의 현장과 기념탑, 상징 조각물 등으로 다시 태어난 독립운동의 성지가 됐다.

1919년 4월 14일.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한 무리는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수원 제암리(현재 화성시)로 들어와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30여 명을 교회당에 몰아넣은 후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살려달라고 창밖으로 내놓은 아기도 무참히 찔러 죽이는가 하면 사격 후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고, 교회당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 모두를 타죽게 만든 잔혹한 만행의 현장이다.

이 희대의 학살은 선교사 스코필드에 의해 미국에 보고됐으며 63년이나 지난 1982년 유해발굴이 되면서 학살사건은 다시 만천하에 알려지게 됐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당시 학살을 이끈 일군의 아리다 중위는 본국 재판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학살 현장은 현재 기념관에 접근해서 가장 먼저 만나는 3·1운동순국기념탑(1983년 건립) 뒤편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당시 예배당 모습을 재현한 제암리 3·1운동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희생당한 23인의 넋을 상징하는 조각물과 23인 순국묘지 등이 당시의 교훈 역할도 하고 있다. 전시관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멈춰진 시간 4·15’는 그날의 시간이 이제껏 100년간 흐르지도 못했음을 말해준다. 오늘의 일본은 다시 역사 왜곡으로, 멈춰진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경기도 안성 만세고개
   
안성 3·1만세운동 당시 파괴된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

# 안성, 2일간의 해방 공간 그리고 만세고개의 사연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수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다. 때문에 제군들은 모두 같이 원곡면 양성면 내의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라. 제군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성히 투쟁하라.”

실력항쟁으로 일제를 몰아냈던 경기 안성에서의 투쟁 격문 중 일부다. 당시 원곡과 양성 2개면의 2,000여 주민들은 서울에서의 3·1운동을 경험하고 돌아온 최은식 선생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주민들은 마침내 4월 1일 거사를 통해 일제를 몰아내고 이틀간의 해방을 이뤄냈다. 두 곳의 면지역에 있던 일제의 기관은 모두 쑥대밭이 됐고, 일본 경찰과 공무원은 피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항쟁은 전국의 3대 실력항쟁으로 꼽히며, 남한 지역에서는 유일한 항쟁지가 된다. 당시 면민들이 모여들어 만세운동을 하면서 일제의 축출을 결의했던 곳이 바로 만세고개다.

가파른 고갯길을 올라 닿은 현장에는 길가에 ‘만세고개’ 넉자를 크게 새겨 넣은 기념비가 당시의 치열했던 항쟁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천덕산 아래 2개 면의 중간쯤에 자리잡은 만세고개의 시비는 당시의 함성이 그대로 들려오는 듯 ‘사람은 죽어서 사라지지만/ 이 만세소리 이곳에 영원하리라’하며 노래하고 있다.

양성면 인근에서 찾은 당시 파괴된 면사무소 자리는 현재의 면사무소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민가로 확인되고 있다.

<특별취재반>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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