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청계산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양재역에서 내렸다. 예전에는 그렇게 붐비던 지하철역이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코로나19가 덮친 역사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인지 차량도, 통행하는 사람도 드물었다.

양재역에서 지상으로 통하는 출구는 계단이 꽤 많아서 걸어 올라가다가 잠시 쉬었다 가야하는 곳이다. 그 길을 오르다 잠깐 예전 생각이 났다.

지난 해 봄 이맘때던가 지인들과 청계산에 오르기로 약속을 잡고 그 때도 양재역에 내렸다. 출근시간이 막 지난 아침 9시 반쯤이었는데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3번 출구 쪽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였다. 흰머리가 고운 할머니 두 분이 나를 불러 세워 길을 물었다.

“성남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나가야 하나요?”

왔던 길을 돌아가 안내소에 앉아있는 역무원에게 길을 물었다. 알고 보니 나도 아까 잘못된 출구로 가고 있었다. 청계산행 마을버스를 타려면 8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데 3번 출구로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제서야 안내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할머니 두 분과 내가 가는 방향이 같았다. 계단을 숨 가쁘게 뛰어올라 두 분을 찾았다. 두 분은 계단에 서서 내가 다시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같이 가시죠.”

두 분이 따라오기 좋은 보폭으로 걸었고, 두 분도 나를 놓칠세라 부지런히 걸어오셨다. 나도 한 번에 걸어가기에는 부담스러운 높은 계단으로 가자고 할 수는 없어 지상으로 연결되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저 없이 내가 제일 먼저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할머니 두 분이, 이어 목발 짚은 소녀가 들어섰다. 내가 지상용 버튼을 누르고 천천히 문이 닫혔고 그보다 더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찰나의 지루함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글자를 찾았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문구 ‘장애인용 15인승’.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장애인도 아니고 노약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할머니들의 길 안내를 구실로 엘리베이터에 탄 것이다.

“아이고, 고맙소.” 지상에 도착하자 할머니 두 분은 길을 알려준 것에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고마운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길 안내를 한답시고 길고 힘든 양재역 계단을 오르는 수고를 덜었으니 말이다.

힘들게 양재역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서서 숨을 고르며 떠오른 그때의 기억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직까지 잘 버텨주는 두 다리와 팔딱대는 심장에 감사하며 마저 계단을 올랐다. ‘일부러 시간을 내 등산도 하는데 이까짓 계단쯤이야’ 하며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김차복 월남전참전유공자. 정보통신부와 통신 관련 회사에서 근무했으며 지금은 서울 명일동에 거주하며 시조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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