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꿈꾼다. 4월은 우리 모두에게 민주주의를 향한 희망이고 진통이었다. 온 산하에 진달래 피어오르는 시절, 시민들은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고 정의와 평화를 외쳤다. 그렇게 일으켜 세운 민주주의가 오늘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있다. 수구적 사고를 딛고 내일을 향하는 꿈, 민족의 화해와 번영을 향한 노력, 악성 바이러스와 싸우는 모든 성숙한 시민의 힘까지. 오늘 4·19혁명 60년을 맞는다. 엄혹했던 세월을 넘어선 우리 모두의 한 발짝, 한 걸음이 오늘의 우리 민주주의를 이뤘다. 다시 4·19혁명을 생각하며 힘을 얻는다.

4·19혁명의 과정과 의미

오늘 우리가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의 역사는 4·19혁명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난과 전쟁으로, 독재정권의 폭압으로 세계의 변방이었던 대한민국은 4·19혁명 이후 비로소 새 나라의 건설에 나서게 된다. 마침내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다시 세우고, 한강의 기적을 일구고, 첨단의 기술로 경제를 살려 새로운 문명의 중심으로 우뚝 섰다. 그 대한민국의 출발은 4·19혁명이다.

4·19혁명은 ‘부정선거에 항의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사건’이지만 그것은 사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세운 제1공화국 정권에 대한 총체적 부정이자 새로운 출발을 뜻했다. 참다운 해방과 독립을 향한 의지들이 모였고 그것이 마침내 혁명적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썩어있었고 시민들의 민주역량은 이미 시대를 앞서 있었다. 독재정권의 횡포는 국민의 분노로 폭발 일보직전이었다. 그것이 1960년이고, 4·19혁명의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19일 덕수궁 앞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을 비롯한 시민들이 모여 있다. 연세대 의과대학 학생들은 중앙청 앞 부상자와 희생자 구호에 앞장섰다.

부정선거, 독재의 끝을 재촉하다

1960년, 이미 사사오입 개헌으로 이승만의 종신집권의 길을 마련한 자유당은 정권안정을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정상적으로는 선거에서 이기는 방법이 없을뿐더러,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선거압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먼저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정권의 충복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해 공무원을 동원했고, 경찰조직도 부정선거의 일선 촉수로 만들었다. 야당이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사망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전승이 확정됐지만, 자유당은 남은 부통령선거 승리를 위해 예정된 부정선거 계획을 밀어붙였다.

선거당일 자유당 완장부대를 동원해 투표소에서의 분위기를 잡는 한편, 투표함 수송 도중 투표함 교체, 개표 시 자유당 표와 야당 표 바꿔치기, 모든 투표구에서의 득표율 85% 달성 등의 세부시행 계획이 내려갔다. 어이없게도 개표 과정에서 터무니없이 높은 자유당의 득표율이 기록되자 긴급히 이기붕 부통령 후보의 득표율을 70% 내외로 조정하라는 지시를 내려 보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유당의 영구집권의 길이 열렸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 4·19혁명의 불길은 시작되고 있었다. 선거기간인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들의 시위에서부터 시작해 3월 5일 서울, 3월 8일 대전 고교생들의 시위로 이어진 불길은 3월 15일 선거일 당일로 이어져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선거일 오전 10시 30분 마산의 선거부정을 목도한 민주당 경남도당이 선거포기, 선거무효를 선언했다.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이 선거의 불법·무효를 전 면 선언하고 정치적·법적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마산에서의 시위는 오후 3시 30분경 시작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대는 거센 파도가 돼 오후 6시에는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7시 30분경 다시 시작된 시위대에 경찰은 발포로 대응했다. 마산중 3년생 김영호 군이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김주열 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것도 이 시위대의 한복판이었다.

전국의 분노, 피의 제전, 국민의 승리

190명 사망, 6,400여 명의 중경상자를 낸 피의 제전은 4·19혁명으로 달려간다. 국내외에서의 항의와 전국에서 일어난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갔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4월 11일 오전 마산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시체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일이었다. 다시 일어난 마산시민들, 그리고 전국의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 시위로 이어진다.

고교생들의 시위에 서울의 대학생들이 잠잠하게 있었던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 마침내 4월 18일 고대생들의 서울도심 시위가 시작됐다. 시내로 진출한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연좌시위 후 귀교 과정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는다.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이 사건은 다음날 4월 19일 피의 화요일로 이어진다.

여러 날 전부터 준비해 오던 서울시내의 대학생들이 조간신문을 확인하고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서울대, 동국대, 홍익대, 중앙대, 경기대, 외국어대, 숭실대, 단국대, 국학대, 국민대, 서라벌예술대가 시내로 진입했다. 숙명여대, 이화여대생들도 시위대열에 뛰어들었고 의대생들은 흰 가운차림으로 시위에 나섰다.

낮 12시 20분, 시위대는 1차, 2차 경무대 저지선을 무너뜨렸고 마침내 오후 1시 40분 시위대와 경찰 간격이 10여 미터로 줄어들자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피를 뿌리는 4·19혁명은 이렇게 고비를 넘어서고 있었다. 무차별 총격을 해대던 경찰은 고교생 시위대에도 난사를 시작했다. 피의 대제전은 오후 5시 경찰이 시내 일원에 걸쳐 소탕전을 개시할 때까지 이어졌다. 경무대 앞 시위에서만 21명이 사망하고 172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상이 벌어졌다.

같은 날 전국에서 이어진 시위는 20일부터 ‘계엄 속의 시위’가 됐다. 그리고 결국 시민들의 분노를 이기지 못한 장면 부통령이 23일 부통령직을 사퇴했고, 4월 25일 300여 명의 대학교수 시위가 있은 후, 드디어 27일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이 집권 11년 8개월 여 만에 대통령직에서 하야했다. 그렇게 민권은 승리했다. 마침내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이다.

끝나지 않은 혁명, 오늘 살아나는 민주주의로 출발

4월마다 들린 그 혁명의 소리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오늘 여기까지 추동했다. 군사쿠데타의 반동이 있었고 장기집권의 서슬 퍼런 날들이 이어졌지만, 80년대 군부의 비극적 정권찬탈이 있었지만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켜오게 된 그 바탕은 4·19혁명이다.

비극적 반민주 문화들이 세상을 횡행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분단을 빌미로 인권을 짓밟는 상황이 이어져도 시민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4·19혁명이 있었고, 그 승리와 역량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가 부러워하는 산업화와 함께 민주주의를 이뤄낸 나라로 우뚝 섰다.

그러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한마음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야 4·19혁명은 완성된다. 민주, 민권, 통일, 화해협력, 번영의 한반도를 향한 과제는 아직도 우리 앞에 있다. 미완의 혁명은 이 과제들을 해결하는 그때 완성이 된다. 그래서 오늘 60년 전의 4·19혁명은 새롭게 출발한다. 다시 살아나는 민주주의의 힘으로 힘차게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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