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여년 동안 경남동부보훈지청에서 보훈섬김이로 일하며 고령·독거 유공자 어르신들을 돌봐왔다. 오늘은 인연이 닿았던 분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은 한 분과 얽힌 추억을 회상해 본다.

경남 김해시에 거주하던 한 어르신이다. 그분 덕분에 이곳저곳을 참 많이도 뛰어다녔다. 그분을 돌보는 과정에 때론 서운한 마음이 들어 혼자 많이 울기도 했지만 보훈섬김이로서 더 큰 보람을 안겨주신 분이기도 하다.

어르신이 혼자 사시는 댁을 처음 방문하던 날이었다. 걸레로 얼마나 닦았는지 장판에 무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청결함으로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 어르신은 군 생활 중 청력을 상실하고, 배우자와 자식도 없이 오로지 친구 한 사람과만 교류하며 지극한 외로움 속에서 자기만의 울타리에 갇혀 계셨다. 전형적인 청각장애 후유증을 앓고 계신 분이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청결함은 결벽증에 의한 것이었고, 그 외에도 누군가가 항상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피해망상을 앓고 있으셨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쉽게 믿지 못해 모든 일을 본인이 직접 챙겨야 했고, 빨간 색깔만 봐도 갑작스레 불안증에 휩싸여 도망치듯 피해 다니셨다.

일주일에 2~3번 어르신 댁을 방문하면서 어르신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고자 애썼다. 홀로 계시는 어르신이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인근 복지관에 연락해 행동 감지센서와 화재경보기, 119응급전화를 설치했다. 방문하지 않는 날에는 지자체 복지담당자와 수시로 연락해 어르신의 건강을 살폈다.

그런 과정 속에 그분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가끔 고맙다는 적극적인 감정표현까지 하실 때는 콧등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를 하신 뒤 어르신께서 이상하게도 기력이 없고 너무 피곤해 하셔서 병원을 찾았는데 하늘도 무심한지 어르신은 악성 폐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곧장 암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여러 차례에 걸쳐 항암치료를 받으셨다. 그 과정이 매우 힘들어 피해망상증이 더욱 심해졌고 결국에는 나마저도 의심하고 가끔 불같은 화를 쏟아 붓는 모습에 안타까움과 야속함이 겹쳐 눈물나는 날이 늘어났다.

하루가 다르게 말라가던 어르신은 관할 보건소와 동사무소의 협조로 인근 요양병원으로 옮겨갔으나 이내 피해망상으로 음식과 일체의 약물치료를 거부하시다가 결국엔 올해 초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

살아계시는 동안 세상에 친구 한 사람만을 곁에 두었던 어르신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드릴 수 있어서, 그 쓸쓸함과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릴 수 있어서, 가시는 그 길을 배웅해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삶의 기본적인 복지혜택을 제때 받지 못하는 분들이 참 많다. 국가유공자 어르신들을 챙겨드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한편 힘들게 사시는 모든 어르신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사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김은희 (경남동부보훈지청 보훈섬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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