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특정한 날을 기념하여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구성원 사이의 연대감과 소속감을 확보하려 한다. 우리는 이를 정체성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체성은 고정 불변이 아니다. 모든 기억은 유기체이며 현재의 시재를 반영하면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않고 과거의 존재를 불러 미래를 말하려고 한다. 사람의 기억이 개별적인 사실들의 퇴적 과정에서 보존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바뀌어 가기 때문이다.

기억의 역동성은 개인과 국가를 구별하지 않는다. 특히 국민국가 만들기에서 기억은 학교와 사회 교육에 의해 다시 창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창조되는 기억은 개인의 기억을 종합한 결과가 아니다. 특히 국가의 기억이 그렇다. 국가의 기억은 개인의 기억과 다를 수도 있고, 개별 사실과도 다를 수도 있다. 기억 자체가 하나의 신념 체계로서 독립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면서 집단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2020년 100주년을 맞이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관한 한국사회의 기억도 그렇다. 두 전투가 일어났을 당시 독립신문에 보도된 봉오동전투는 삼둔자전투로 대표되었다. 청산리전투도 북로군정서 군대의 보고서가 한국인의 기억을 지배했다. 해방 후 주권국가를 수립했음에도 20여 년이 넘도록 두 전투에 관한 국민의 기억은 없었다. 국가가 기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전투의 실상은 1970년대 들어 학교 교육에서부터 복원됐다. 학교 교육은 독립군의 희생적인 싸움과 더불어 봉오동전투를 홍범도가, 청산리전투를 김좌진이 각각 지휘한 듯이 전승했다. 이 구분법은 21세 초반까지도 유통된 기억이다. 반면에 북한의 역사 교육은 홍범도까지만 언급한다. 김좌진이 없고 청산리전투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방점이 있다.

두 전투가 이 시점에 복원된 이유는 활발한 학술연구의 결과가 아니었다. 주체사상에 따라 김일성을 중심에 두고 항일운동사를 재해석하고 있던 북한의 움직임에 대응한 결과였다. 무장투쟁을 포함하는 독립운동사를 기억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청산리전투와 홍범도의 연관성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후반 경이었다. 그때는 냉전체제가 동요하며 사회주의 국가들이 개혁 개방에 나선 시점이었다. 1990년대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면서 홍범도에 관한 정보가 더 풍부해졌다. 그는 소련공산당에도 입당했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해 고국을 그리워하다 크질오르다라는 곳에서 1943년에 순국했다.

홍범도의 여러 활약상이 알려지는 가운데 그가 청산리전투의 한 축을 담당하는 부대를 지휘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면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영웅을 나누어 구분하는 한국사회의 기억도 해체됐다.

그런데 두 전투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은 어디서 어떤 일본군과 싸워 승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전투사 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범도와 김좌진은 영웅으로 받들어졌다. 반면에 이름 없는 독립군에 대한 관심은 간단한 말잔치에 불과하였다. 이들보다 더 잊힌, 아니 관심의 대상 자체도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립군을 도와준 이름 없는 민초가 바로 그들이다.

독립군은 튼실한 장정들이었다. 그들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흔히들 봉오동전투 때 600여 명, 청산리전투 때 1,200여 명의 독립군이 참전했다고 말한다. 이들이 입고, 먹고, 마실 수 있는 보급품은 특정 개인이 크게 헌신한 경우도 있지만, 민초들이 십시일반(十匙一飯)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결과였다. 동만주지역 조선인사회가 한마음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보급결과였다.

민초들의 활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일본군의 동향을 독립군에게 자발적으로 알려주었다. 일본군에게 거짓으로 진술해 독립군이 조금이라도 자유롭고 안전하게 움직이는 데도 기여했다. 민초들은 독립군이 무장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일대에서 구입한 소총, 기관총, 대포, 탄약 등을 200여 km 떨어진 왕청현 일대의 독립군에게까지 전달하는 짐꾼이 그들이었다. 민초들은 추운 겨울의 눈 덮인 산속을 밤중에만 행군하며 일본군과 중국군에게 한 차례도 발각당하지 않고 독립군에게 무사히 무기를 인도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민초의 활약에 주목하는 움직임은 이제 시작됐다. 앞으로 두 전투에 대해 한국사회가 확장적으로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사항은 걸출한 두 지도자, 이름 없는 독립군, 그리고 민초들의 연대이다. 하나가 되었기에 세계 제3위의 전력을 갖춘 일본군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는 역사이다.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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