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강제징용에서 6.25전쟁까지 이르는 시대적 배경을 때로는 담대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써내려간 하근찬의 단편소설 「수난이대」에는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쳐 온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 자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수난이대의 등장인물인 아버지 박만도는 삼대독자인 아들 박진수가 생사를 알 수 없던 전쟁터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어깻바람이 절로 나서 아들을 배웅하러 역전으로 향한다. 강제징용 피해자인 그는 멀쩡한 섬에 비행장을 닦는 공사 중에 비행기의 폭격으로 왼쪽 팔을 잃었다. 박만도는 애써 태연한 체하며, 조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소매자락을 넣은 채 우리 진수가 설마 나처럼 되지는 않았겠지 하며, 속으로 걱정한다. 그래도 이내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장터에서 실해 보이는 고등어 한 놈을 사서는 기분 좋게 계속 역전으로 걸어간다.

꽤액~ 기차가 도착하였다. 고등어를 한 손으로 들고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다리 하나를 잃은 채로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부르는 아들을 보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가자, 어서!” 라고 하며 집으로 향한다.

다리 하나를 잃은 아들과 자신의 속내를 들키기 싫은 무뚝뚝한 박만도의 빠른 걸움으로 부자의 간격은 점차 벌어진다. 집에 가는 길에 술집에 먼저 당도하여 한사발 시원한 술로 뜨거운 감정의 북받침을 식힌 박만도는 아들에게 곱빼기로 참기름을 친 국수 한 사발을 사준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에 “이래 가지고 우째 살까 싶습니더.” 라는 절망 섞인 아들 진수의 말에 박만도는 “잘 걸어댕기기만 하면 뭐 하노? 손을 지대로 놀려야 일이 뜻대로 되지!!” 라고 지긋이 아들을 보고 웃으며 위로한다.

소설은 두 팔이 있는 아들이 한 손엔 아버지가 사 오신 고등어를 들은 채 나머지 한 팔로 아버지의 굵은 목을 감고 두 다리가 멀쩡한 아버지가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꼬옥 안아 엎은 채로 외나무다리를 건너며 끝난다.

소설 「수난이대」의 줄거리이다. 소설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아픔을 가족의 힘으로 이겨내 장면으로 마무리되지만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외나무다리는 결코 녹록치 않다.

국가의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몸 바친 순국선열, 국가의 안위를 지키려다 희생당한 호국영령, 민주적 가치를 위해 피 흘린 민주열사들이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는 결코 개인과 가족만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거나 “군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세간의 말은 우리 보훈체계가 좀 더 세심하고 촘촘하게 작동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 지점에서 보훈은 사회보장과 만나게 된다.

사회보장(Social Security)이라는 용어에서 보장(Security)의 어원은 Se(=without: ~로부터 해방되어)와 Cura(=care: 걱정 혹은 근심)가 결합된 용어이다. 즉, 사회구성원이 질병, 부상, 실업, 출산, 노령, 장애, 빈곤, 재해, 사망 등 삶의 연장선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영역의 걱정과 근심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사회보장인 것이다. 여기서 나라의 독립, 호국과 민주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한 희생과 헌신을 하신 분들의 근심과 걱정을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현재 보훈대상자에 대한 지원은 크게 보훈급여금, 교육, 대부, 의료, 생업 지원 등이 있다. 재원의 부족, 타 제도와의 관계 등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하더라도 사회보장 영역보다 협소한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보훈대상자는 단순히 원호의 대상이 아닌 예우의 대상이므로 이에 합당한 수준의 보훈정책이 필요하다.

모든 정책이 그러하지만, 보훈정책이 실제 보훈대상자들의 아픈 몸과 근심이 서린 마음에 와 닿으려면 보훈대상자들의 수요를 고려한 정책서비스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전체 보훈대상자들의 평균 연령은 71세로 대부분 연로하다. 고령화로 인한 면역력 저하와 건강 악화 등은 보훈대상자들의 말년의 삶의 질을 위협하고 있다.“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라는 말처럼 보훈대상자들의 건강권을 더욱 보장해줄 수 있도록 보훈체계를 더욱 공고하게 할 필요가 있다. 특히, 보훈대상자들이 아프고 병들기 전에 생활습관을 바로잡고 건강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건강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보건교육을 주기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훈대상자들에게 양질의 건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진다’는 보훈정책의 기본이념에 가장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보훈의료통합복지서비스(Bohun-THIS) 등 보훈대상자들의 예방, 치료, 요양 등 포괄적인 건강보장 체계가 이미 구축되어 있는 점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으나 진정한 보훈의료통합복지서비스는 지역사회와의 더욱 끈끈한 연대가 필요하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로움은 의료의 영역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케어(community care) 즉, 지역사회 통합 돌봄 속에서 보훈대상자의 의료와 복지가 어울러져야 한다. 지역주민과의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의식의 공유가 동시에 이루어져야만 보훈대상자의 근심과 걱정을 진정하게 해소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보훈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국민들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줌으로써,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촉진제이다. 단순한 금전적 보상에서 그치지 않고 보훈대상자들의 남은 여생을 건강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지역사회 기반의 보훈체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수난이대에서 보훈이대, 보훈삼대로 이어지는 평화공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정태영(보훈교육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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