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의 현장에는 많은 여성이 있었다. 그들은 시대와 함께하는 역사의 주역으로서 여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잃은 슬픔에 비분강개했고, 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는 의지가 있었다. 일제 식민지에서 민족차별을 없애기 위한 민족해방이 곧 여성해방을 위한 지름길이라고 생각한 여성들도 많았다.

항일독립운동은 단순히 저항하는 운동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이 근대국가의 주인이 되는 역사적 역동의 운동이었다. 그래서 3·1운동 이후 수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에서 남녀평등권과 여성 참정권을 선포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출범부터 여성의 정치적 평등과 권리를 명시한 것은 근대국가의 지향이자 독립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을 반영한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의열투쟁·임정활동

3·1운동에서 여성들은 대중적·조직적으로 참여했다. 감옥에서 죽은 여학생 유관순이 3·1운동의 상징이 되듯이, 거리와 감옥에서 여성들의 모습은 여성이 독립운동의 주체가 되었다는 것과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이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을 보여주었다. 3·1운동이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된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도 컸다. 개성의 권애라, 어윤희는 호수돈여학교를 중심으로 개성의 첫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부산의 주경애, 박시연은 부산·경남지역의 첫 만세시위인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운동을 지휘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있는 삶의 현장에서 일제 권력에 의한 폭력과 공포를 견뎌내는 사회적 실천을 통해 3·1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했다.

3·1운동 이후 여성들은 남성 못지않게 무장투쟁, 의열투쟁, 대중투쟁, 임시정부 활동 등을 했다. 1919년 4월 중국 지린성에서 발표되고 디아스포라 한인 여성사회에 배포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여성들만의 독립선언서로서, 여성들이 새 국민이 되는 독립운동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서울과 평양에 본부를 둔 애국부인회는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과 그 가족을 후원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했다.

1920년대 이후에는 많은 여성단체가 조직되었다. 여성해방론의 등장과 함께 민족문제와 여성문제를 함께 해결하려는 운동이 본격화됐다. 1927년에는 전국적 여성단체로서 근우회가 결성되어 좌우 합작운동의 일환으로서 여성운동이 독립운동과 연계되어 발전하였다. 근우회는 국내외에 60여 개의 지회를 만들고, 여성 의식 향상과 여성 민중운동을 지원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때, 근우회의 허정숙, 박차정 등은 “대중적 위력으로 민족적 항의를 보여줌으로써 구속 학생을 석방하고 민족적 기치를 들기 위해 시내 각 여학교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자”고 결의하고 1930년 1월 서울의 여학생 만세시위를 조직했다.

여성들의 독립운동은 일상 속 대중운동에서도 활발했다. 1930년대 초 평양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순국한 강주룡은 고무 공장주의 임금 인하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을밀대 지붕 위에서 1인 시위를 벌여 체공녀(滯空女) 즉 ‘공중에 떠 있는 여자’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맹렬하게 활동했다. 1930년대 초 여학교를 다닌 신여성 박진홍, 이순금, 이효정, 이병희 등도 공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1924년 암태도 소작투쟁에서는 암태도부인회가 조직적으로 지원하고 참여했다. 제주 구좌면에서는 일제 관헌의 해녀조합에 대한 부당한 침탈에 저항한 해녀투쟁이 있었다.

무장투쟁에서도 여성들은 빠지지 않았다. 영화 ‘암살’의 주인공 안옥윤처럼 총칼을 들고 싸운 여성 무장투쟁의 선구자로 의병 윤희순과 근대의 여걸 남자현이 있다. 근우회 활동을 했던 박차정은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원이 되고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여성 교관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청천 장군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고, 조선의용대의 부녀복무단장이 되었다.

독립운동, 식민지 여성의 삶의 현장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있으니, 부녀들이 총 단결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할 것을 주장했다. 조선의용대에서 박차정, 허정숙, 이화림, 전월순 등이 활약했다.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조직 대원에는 여자광복군이 정식으로 입단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 권기옥을 비롯하여 신정숙,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김영실, 김일옥, 조순옥, 민영주, 신순호, 윤옥 등이 활동했다.

무장투쟁에 참여한 여성들은 전쟁이라는 현장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다각적인 활동을 개척했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여성들은 방송과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 한국말로 강연, 연극, 노래 등 위문공연을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훈육 활동을 통해 2세들이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했다.

최근 독립운동가의 아내에 대한 서훈 방침이 정해지면서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분들은 가부장제 가족관계 때문에 헌신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의 아내, 며느리, 어머니이기 이전에 나라를 찾는데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다는 생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들은 디아스포라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생활공동체를 이끌며 돌봄의 가치를 실현한 독립운동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는 전체 서훈자 가운데 3% 남짓이다. 그마저도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독립유공자 서훈의 폭을 넓혀서 그렇다. 여성의 독립운동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남성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여성의 독립운동은 민족과 국가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기억되기 전에 식민지에서 살아간 여성들의 삶의 현장으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자신들이 사는 현실이 일제의 식민지인 것을 자각한 여성들이 물러서지 않는 삶을 선택한 곳에 독립운동이 있었다.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여성의 역사와 독립된 근대국가를 만드는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 여성 독립운동의 빛나는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지원 대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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