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 참석한 한중 대표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군했다. 1919년 3·1독립운동의 힘으로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 수립 이후 20년만의 일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광복군 창군을 통해 군사력(무력)을 갖춤으로써 국권과 국토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투쟁과 작전역량을 갖추게 됐다. 올해로 창군 80년을 맞으며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된 한국광복군 창군과 그 활동, 의미를 짚어본다.

조국독립의 불꽃, 한국광복군 창군의 의미

1919년 4월 11일, 한 달여 전부터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 중인 3·1독립운동의 열망을 안고 중국 상하이에서 역사상 최초인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일본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정규전의 전개를 지상목표로 설정했으며, 여러 의열투쟁 이후 광복군 창군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특히 미주 교포들의 조직에 대한 공감과 재정적 지원이 큰 힘이 돼 드디어 1940년 낯선 땅 충칭에서 임시정부의 힘이 될 역사적인 광복군 창군을 이뤄냈다.

한국광복군 역사적 배경과 성립

임시정부 수립 이후 중국 내에서의 활동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일본의 악랄한 탄압과 방해 공작에 시달리던 임시정부는 오랜 근거지였던 상하이를 떠나 중국 대륙을 전전하면서 힘들게 명맥을 유지해 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1940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는 정부 체제의 정비와 함께 정상적 운영을 도모하게 된다. 요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드디어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으로 역할을 갖추면서 삼위일체의 체제가 확립됐다.

이에 앞서 임시정부는 1939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향후 3년간의 독립운동 방략을 세우고 기본 무장군 10만 명을 편성해 독립전쟁을 추진한다는 전략을 공식화했다. 이 계획이 완료되면 기본 무장군과 함께 장교 1,200명과 유격대원 35만 명을 확보해 일본군을 동북3성에서 몰아내는 한편, 최종적으로 한반도에서도 적을 축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조직의 체계와 힘을 갖추기 시작한 임시정부는 드디어 1940년 9월 15일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서 임시정부는 “원년(1919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따라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장개석)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선언”하고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고 천명했다. 김구 주석은 이를 통해 “한중 연합전선에서 우리 스스로의 계속 부단한 투쟁을 감행하여 극동 및 아시아 인민 중에서 자유평등을 쟁취할 것을 약속한다”고 선언했다.

드디어 9월 17일 아침 6시 내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가 열렸다. 가릉빈관은 서방 연합국 기자들이 활동하던 호텔로 일종의 프레스센터 역할을 하던 공간이었기에, 이날의 ‘전례’는 보도를 타고 세계 각국으로 관련 소식을 전했다. 이날의 전례위원회는 장제스 총통에게 정식으로 서한을 보내 한국인 2,500만명 이름으로 양국의 ‘항전 건국’을 확신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면서 항전의지를 다졌다.

청년들의 합류, 선전포고, 전선 투입

역사적 첫 발을 뗀 광복군은 그해 10월 지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참모장을 중심으로 총무처, 참모처, 부관처, 정훈처 등 6개 처의 처장을 간부로 임명하고 총사령부의 활동목표와 당면전략을 수립했다. 광복군의 활동목표로는 △분산된 역량을 광복군에 집중해 전면적 조국광복 전쟁 전개 △중국군과 연합 왜적 박멸 △국내 민중의 무장 반일운동 적극 지도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 무력적 기간 성립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저해하는 일체의 요인 제거 등이 포함됐다.

이어 대대적인 광복군 모집에 들어간 임시정부는 1942년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이후 후베이성과 저장성에 각각 구대를 설치, 대원 모집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특히 중국 내 한인 청년을 대상으로 한 모집활동은 성과가 매우 컸다. 광복군은 1944년 학병으로 중국전선으로 끌려온 수백 명의 한인청년들이 임시정부와 광복군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8·15 전후에는 1,000여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보유하게 됐다.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도발에 대해 ‘대일본선전포고’를 발표함과 동시에 광복군 전 부대의 결전 태세 강화를 촉구했다. 1942년 임시정부는 국무회의 결의로 조선의용군을 한국광복군에 편입한데 이어 총사령부를 충칭으로 이전 복귀하면서 활동범위를 본격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1943년 6월에는 광복군 지청천 총사령과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 대표 맥켄지 정보참모가 ‘한영 군사 상호협정’을 체결, 광복군 공작대를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 전구에 파견키로 하고 영어와 일어에 능통한 대원을 선발했다. 이들은 그해 9월 인도에 도착해 최전방 영국군 전투부대에 소속돼 대적방송, 전단작성, 포로 심문, 첩보 분석 등의 분야에서 1945년 7월 15일까지 활동했다. 공작대는 실전에도 참여했는데 영국군과 인도군의 접전이 있었던 임팔전투와 1945년 버마 총반격전에도 참전해 작전 수행에 큰 역할을 했다.

한국광복군 OSS훈련반.

국내진공작전, 교전국 지위 획득을 위한 결단

광복군의 지상목표는 국내로 진입해 일본군을 상대로 대규모 정규전을 벌여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그 가능성이 열렸다고 판단한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 등에 대일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이 가까워졌다고 분석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복군을 태평양지역에 파견해 미국의 상륙작전에 협력하고자 시도했다. 이를 위해 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국(OSS)과의 합작을 추진했다. 다른 한편으로 병력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투입해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전개한다는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을 세워 광복군 제2지대 대원 중 50명을 선발해 특수훈련을 마치도록 했다. 이 모든 실전 작전은 임시정부 국군인 광복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함으로써 전후 교전국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의 하나였다.

8월 7일 마침내 김구 주석과 OSS 총책임자 도노반 장군에 의해 특수훈련 수련생을 중심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합군 출발 직전 일본의 항복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다. 수년간 준비했던 참전 준비는 허사로 돌아가고 광복군의 실전투입이 불가능해진 순간이었다.

광복군 제1지대 대원들의 모습.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가 발표한 대일선전포고 성명서.

대한제국 국군-독립군 이어 대한민국 국군을 잇는 군맥

광복군의 국내진입이 무산된 후 김구 주석은 “천신만고로 수년간 참전을 준비한 것도 다 허사가 됐다”며 한탄했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싸워서 쟁취하지 못한 독립, 일본을 힘으로 이겨내지 못한 대가로 해방 후 숱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던 운명을 예감처럼 느꼈던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광복군이 대한제국의 국군과 만주지역의 독립군을 계승하고 30여년에 걸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을 기반으로 창설됐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자주독립 군대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은 해방 대한민국 국군으로 이어지는 ‘대한’의 군맥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광복군은 30여명의 인원으로 출발한 독립군이었지만 열악한 인적, 물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라는 타국 영토에서 중국군에서 스스로의 지휘체계를 확립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겨냈다. 그리고 1,000여명의 군대를 조직해 마지막 진공작전을 준비했던 열정으로 싸웠고 임시정부를 지켜냈다.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된 광복군은 그 존재 자체로 자주국방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지키는 든든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