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극단의 현장이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은 목숨을 걸고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타인의 생명에 총을 겨눈다. 전장 주변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편에 서다 저편에 서다 희생당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된다. 그 상처는 다시 공동체의 상처가 되어 오랜 세월을 견디며 치유의 과정을 가게 된다. 6·25전쟁을 두고 ‘기억’ ‘성찰’ ‘평화를 위한 반성’으로 조명했다. 지난달 15, 16일 있었던 6·25전쟁 7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국제학술회의의 소리를 듣는다.

‘끝나지 않은 세계전쟁’ - 성찰과 반성

올해로 한국 전쟁이 있은 지 벌써 70년이다. 그 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어서 이제 이 전쟁을 경험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쟁의 경험은 희미해졌을 것이다. 전쟁을 경험해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이 변한 현실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세대들에게 이 전쟁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설이 있다. 한반도의 상황은 적어도 고등정치의 영역에서는 현실이 70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아직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전쟁의 위협 아래 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명분, 특히 지난 세기 전반 큰 힘이었던 이념의 언어들만 바뀌었을 뿐 지정학적인 요인은 거의 그대로이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파괴와 살상, 반성은 없었다

올해 6월 25일, 6·25전쟁 70주년 기념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 전쟁이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이었다”고 정의하고, 이어서 “이 전쟁을 이제는 끝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우 시의적절한 지적이다. 이 전쟁에 대해 한마디 덧붙인다면 ‘슬픈 전쟁’과 함께 ‘어리석은 전쟁’ 그리고 ‘부끄러운 전쟁’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전쟁이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한국전쟁은, 특히 한국인들에게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 슬프고 어리석은 전쟁이 어째서 7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고 있는가.

남북한 간의 적대관계를 끝내고 평화를 심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올해는 마침 남북 간의 첫 정상회담과 그 회담의 결실로 6·15 선언이 나온 지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당시 우리들의 흥분과 기대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수많은 노력과 합의, 그리고 선언이 있었지만 아직도 손에 잡히는 성과는 없고 남북 간의 갈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우선은 한반도 내부의 문제를 짚어보아야 한다. 휴전 후 7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한반도 평화가 아직 요원한 것은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반도에 파괴와 살상 이외에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은 전쟁에 관해 우리 자신이 충분히 반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 후에도 한동안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적대적인 감정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기는커녕 상대방을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

여기에는 물론 당시 현실적으로 권력을 갖고 행사하던 집단들의 요인이 있는 게 사실이다. 오늘날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어느 누구의 탓을 돌리거나 누구에게 책임을 묻고 잘잘못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잘못된 과거를 뒤돌아보고 그 실패를 반성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바르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이제 끝내는 것은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과거를 바르게 하는 일이다.

한반도의 원죄, 과거를 바르게 하려면

냉전의 해체와 함께 이미 전쟁의 역사적인 사실에 관해서는 그 윤곽이 알려져 있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김일성은 스탈린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 전쟁을 시작했다. 그의 목표는 한반도를 통일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휴전이 됐을 때 한반도는 통일은커녕 분단이 더욱 고착돼 있었다. 지키기도 어려운 북위 38도선은 요새화된 비무장 지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더욱 큰 분단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 잡았다.

정전이 이뤄지자 온 세계가, 특히 참전했던 나라들이나 군인들은 모두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피해를 당한 한국인들은 여전히 상처와 증오로 무기를 움켜쥔 채 상대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회주의의 실현은커녕 남한에는 격심한 반공주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다. 그리고 전쟁 전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어려운 문제에 휩싸였던 이승만 정권은 오히려 이 전쟁을 통해 튼튼한 안보의 기초를 마련하게 됐다. 김일성은 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 계획했던 것과는 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 셈이다.

남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을지라도 북한의 군비나 전쟁 준비에 무지했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북진통일론으로 국민의 정세 판단을 혼란하게 했다. 그는 실제 전쟁을 막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고, 국민에게 전황을 바로 알리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해 특히 수도 서울에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그리고 수복 후에는 ‘북측에 어쩔 수 없이 협력한’ 민간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적어도 휴전으로 전쟁이 일단락됐을 때 국민들이 당한 고통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오히려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지도자, 국부라는 호칭까지 누리면서 권력을 유지했다. 반성이 없는, 실패한 전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의 어려움에 있어서 원죄처럼 작용한다. 남북한 간의 활발한 교류와 협력은 그 효과는 물론 그 자체로도 매우 긍정적인 일이다. 그러나 수많은 좋은 의도와 훌륭한 합의문이 나와도 ‘과거를 바르게(正古)하지 않으면’ 그것이 튼튼한 기초 위에 설 수 없다.

주변국의 변화, 패전국들의 부활

문재인 대통령은 올해의 기념사에서 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전쟁 특수를 누린 나라’들도 있었다는 점을 언급했다. 매우 적절한 지적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지만 단지 우리가 이런 사실들에서 의미 있는 추론을 이끌어내지 못했던 것 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문제에 잠시 언급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의 어리석은 전쟁으로 다른 나라들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면, 우리 스스로의 잘못을 탓할지언정 그런 나라들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한 번 더 어리석은 일이 된다.”

세계의 거의 모든 중요한 나라들이 이 전쟁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직접 혹은 간접으로 참가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세계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지 경제적인 이득만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나름대로 자국의 입장과 이해관계, 전략적인 고려 등을 가지고 있었다. 교전국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한 중립국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일들이 모두 자국의 국익, 자신들의 위상과 영향력의 추구와 관련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국제 사회의 현실에서 이런 나라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수는 없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다.

현실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전쟁으로 가장 이득을 챙긴 것은 역설적으로 지난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의 참화로 파산된 경제를 경이적으로 부활시킨 ‘기적’을 가져왔다. 아무도 예상 하지 못한 상식을 뒤흔드는 놀라운 경제 재건과 도약에 못지않은 이득은 이 나라들의 국제 정치적 위상의 재건과 도약이었다. 이 기간을 거치면서 일본도, 독일도 패전국의 위치에서 바로 과거의 전통적인 지정학적 위상으로 복귀하게 됐다.

현재 우리들이 외교의 영역에서 까다로운 문제 중의 하나가 되고 있는 한일 관계의 어려움도 상당한 부분이 70년 전 우리 스스로가 저지른 전쟁에 영향을 받고 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도, 그 후의 이른바 ‘55년 체제’도 이 어리석은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빠른 시기에 그런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도 바로 얼마 전까지 생각할 수 없었던 재무장이 예상을 뒤엎고 큰 저항 없이 이뤄졌다. 그리고 한 세대를 조금 지나는 사이에 재통일을 이뤘다.

이런 나라들이 경제적인 번영과 함께 국제 사회에서 자신들의 위상과 역할을 추구하고 세우는 사이, 한반도는 전운이 감도는 채 이 실패가 여전히 지역과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 갇혀 있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과거를 제대로 뒤돌아보고 반성하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으로 살펴보는 전쟁

또 다른 화두는 전쟁과 여기에 참여하거나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문제다.

전쟁에는 이른바 고등정치의 영역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는 국가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정책이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살육의 현장인 전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이라는 모든 일상이 뒤엉키는 살육과 파괴의 와중에서도 생명을 유지하고 가능한대로 정상적인 생활의 편린이라도 유지해보려는 보통 사람들의 눈물 어린 노력들이 있다. 존스타인벡(John Steinbeck)은 이것을 두 개의 전쟁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전쟁에는 대통령, 수상, 장군이 아닌 이름 없는 사람들, 병사, 남편, 아내, 주부, 어린이, 아버지, 어머니, 친구, 일가친척들이 있다. 최근에는 전쟁에 책임이 있는 위대한 지도자나 영웅들에게만 몰두하지 않고, 전쟁에 나간 병사들과 가족들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나 그들의 이야기들이 출판되거나 연구주제로 오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정부가 전몰장병 유해 발굴 사업에 많은 배려를 하는 것은 상당히 평가할 만한 일이다.

이 같은 흐름은 인도주의적, 혹은 감상적 차원에 머물 수 없다. 전쟁에 처한 일반인들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인식은 이른바 고등정치의 영역에 관한 심각한 반성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권력의 언어와 논리는 올바른 이념, 노선, 민족과 국가의 영광 등으로 일시적으로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다. 그러나 긴 역사의 안목으로 보면 오히려 진정한 진보나 역사의 전개는 이름도 없는 수백 수천만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 점에 관해 우리에게 오래된 민간의 지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또한 톨스토이의 대작인 ‘전쟁과 평화’의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위대한 지도자 또는 영웅이라고 추대를 받는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이 전쟁을 ‘영광스러운 성취’로만 생각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전쟁과 사람’이라는 문제는 다시 중요한 역사 연구의 과제로, 그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이자 반성해야 할 과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종일 가천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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