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서훈과 독립유공자 지정은 관련법에 따르는 것이지만, 법의 제정이나 적용은 독립운동에 대한 일반의 인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한 독립운동이 한국사회에 준 공헌이나 독립운동가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정치·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지난달 17일 독립기념과 독립운동사연구소는 ‘독립운동가 서훈의 역사와 과제’라는 학술포럼을 열고 독립운동가 서훈이 시기별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검토하고 향후 발전과정을 검토했다. 이날 한국교원대 김한종 교수의 발표 ‘해방 이후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요약 정리한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과 서훈

독립운동가와 독립유공자의 개념

독립운동가와 독립유공자는 같은 속성의 사람일까, 아니면 차이가 있을까. 이 말을 들을 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자의 범주를 거의 구분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서훈에 문제가 없다면 독립유공자는 독립운동가여야 한다. 그렇지만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반드시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국가가 명시적으로 언급한 독립운동가의 정의는 없다. 일반적인 국어사전에서는 독립운동가를 ‘일제 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여러 가지 민족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독립유공자의 경우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법에서는 독립유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를 내리지 않은채 독립유공자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법 1조에는 목적을 “이 법은 일제로부터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공헌한 독립유공자와 그 유족에게 국가가 합당한 예우를 함으로써 …”라고 되어 있다. 이 법이 말하는 독립은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운동가의 ‘독립’과 별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실제 독립유공자 서훈의 ‘독립’은 이런 의미만은 아니다. 실제 서훈에 적용되는 ‘독립’의 의미는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뿐 아니라 새롭게 나라를 세운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 새로 세우려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였다. 이 관점을 적용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데 긍정적 기여를 하는 사람이어야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공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애매하다. 그러니까 이와는 반대의 접근방식으로 독립운동가 중에서 대한민국 건국에 지장을 주지 않은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해방~제2공화국: 보훈체제의 성립과 사회의 무관심

해방 직후는 사회에서 민족의식이 크게 고양되었던 시기이다. 당연히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적 평판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많은 경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은 명확한 근거가 있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실제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찾아서 공적을 확인하고 국가 차원에서 서훈을 하는 데는 소홀했다. 독립운동가의 귀국을 환영하는 대회가 열리고 민족정신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외형적 사회 분위기에 비하면 의아스러울 정도로 독립운동가 서훈에 관심은 없었으며 사회적 논의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부 수립 후에도 독립운동가 서훈이 주요 국정 과제로 제시되지 않았다.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사람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독립운동가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가장 시급한 과제로 내세운 것은 북한을 비롯한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독립에 얼마나 공이 있는지 보다는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운영하는데 유능한지가 사람의 가치를 판별하고 정부의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는 기준이 되었다. 법적 기준이나 규정을 넘어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데 얼마나 충실할 것인지가 능력의 척도였다.

정부수립 후인 1949년 독립유공자 서훈이 시작됐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이 서훈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1950년대에는 헐버트와 장제스가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 중 장제스가 서훈을 받은 것은 일제하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는 사실도 작용했다.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에서도 독립유공자 서훈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민주당 안에는 독립운동가 출신도 있지만, 일제하에서 지주나 자산가로 살았던 사람들도 많았으며, 친일 행위로 비판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찌 보면 이런 구성원을 가진 민주당 정부가 독립운동가 서훈에 적극적이지 않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박정희 정부 이후: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 고조, 소극적 서훈

박정희 정부는 ‘국적 있는 교육’을 내세우면서 민족전통을 강조했다. 민족주체사관은 박정희 정부의 역사교육관을 말해주는 표현이었다. 역사교육에서 대외항쟁사와 국난극복사가 강화되고, 역사교과서 내용에서 독립운동사의 비중이 높아졌다.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항쟁, 일제하 무장투쟁 등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이 한국근대사의 주요 내용 영역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독립운동가를 적극 발굴하고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데도 적극적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 실제로 5·16 군사정변 직후 보훈대상자를 이전의 전쟁 희생자에서 독립과 민주화에 기여한 사람까지 확대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강조했던 이념과 교육 방향에 비하면 독립운동가 서훈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 심지어 매년 열리는 3·1절과 광복절 기념식의 기념사에서도 독립운동이나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3·1운동이나 독립정신의 진정한 의미는 그 뜻을 현대에 살리는 데 있다고 하면서 자주, 자립, 번영 등을 강조할 뿐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8년간 683명의 독립유공자를 서훈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서훈 사업은 지속적이지 않았다. 정작 박정희 정부가 민족주체성을 본격적으로 강조하던 1970년 초부터 중반까지는 서훈이 별로 없었다. 이는 민족주체성 교육이 교육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교육 정책은 경제개발과 국가안보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 

김영삼 정부~김대중 정부: 독립운동 인식과 독립유공자 서훈 확대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화가 가속화됐다. 정치 분야에서 시작된 민주화의 물결은 사회와 경제, 문화와 학술 연구까지 확대됐다. 역사학과 역사교육도 사회의 이런 동향에 영향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개념을 새로 설정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연구 범위가 넓어졌다. 친일 연구가 본격화하고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졌으며, 관심도 높아졌다.

사회 전반에서도 민족운동이나 독립운동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졌다. 역사학계의 근현대사 연구 동향과 성과는 역사교육에 반영됐으며, 독립유공자 서훈 논의로 이어졌다. 1990년에 간행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처음으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그리고 항일연군이 포함됐다. 이후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은 역사교과서 서술에 빠지지 않는 무장독립투쟁이 됐다. 이에 반해 동북항일연군은 1996년 교과서에는 다시 빠졌으며, 2002년 교과서에도 언급되지 않다가 2006년 교과서에는 다시 들어갔다. 동북항일연군이 고등학생이 알아야 할 항일투쟁인지 여부가 아니라 역사인식을 둘러싼 사회 갈등과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북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훈 논란과도 비슷한 성격을 가진다.

김영삼 정부는 ‘민족정기를 되살린다’는 명목을 앞세워 일제의 식민잔재 청산 작업을 진행했다. 1994년 12월 31일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1995년 1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간 것은 이런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독립유공자 보훈이 다른 국가유공자와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시행됐다. 김영삼 정부는 독립유공자의 대상을 확대하고, 이제까지 대상에서 제외됐던 사람들을 조사해 포함했으며, 독립유공자 후손의 지원을 손자·손녀대까지 넓혔다. 이런 정책은 김영삼 정부가 이전 군사정부와는 구분되는 ‘문민정부’로 정통성을 가진 민주정부임을 부각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정책으로 독립유공자 보훈의 미비점이 개선되고, 대우가 양적·질적으로 개선되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김영삼 정부의 독립유공자 보훈정책에 의해 이제까지 배제돼왔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의 서훈이 이뤄졌다. 1995년 이동휘에게 제2등급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된 것은 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은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제외되었으며, 독립운동가의 개념이 재정립되지도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친일행적이 있는 독립유공자를 찾아내서 서훈을 취소하는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 결과 1996년 친일 독립유공자 5명의 서훈을 박탈했다. 그러나 1993년에 시작된 조사는 몇 년 후에야 결과를 밝혔으며, 그것도 애초 조사 대상이던 인물 중 일부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후에도 친일 행적이 밝혀지는 독립유공자의 서훈을 박탈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이후: 민주화 정착 이후 독립운동가 인식과 서훈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정착이 됐다. 독립운동의 범주가 확대되고 논의가 자유로워졌다. 독립유공자를 보는 사회의 시각도 개방적이 됐다. 자연히 그때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유공자가 됐다. 2005년에는 김재봉, 권오설, 김남수, 김철수, 차금봉 등 1920년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서기나 주요 인물들이 독립유공자에 지정되고, 2006년에는 경성콤그룹의 이재유가 서훈을 받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부 인물들은 서훈되지 않았다.

독립운동 인식이나 독립유공자 서훈의 이런 움직임은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라는 보수 정부가 들어선 다음에도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독립운동이라는 영역 자체가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이전 정부에서 한 일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09년 그동안 국적이 없었던 독립운동가 62명의 국적을 살린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렇지만 2000년대 들어 역사인식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에서 심화됐으며, 이는 보훈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거듭되면서 한국사회는 정치적, 이념적으로 분열되는 현상을 보였다. 사회 한편에서는 한국근현대사 연구와 교육이 좌편향됐다는 비판이 나와서 심각한 사회 갈등으로 이어졌다. 이 갈등은 정치와 언론, 학계를 넘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논란은 주로 현대사에 집중되었지만 독립운동사 교육도 쟁점 중 하나였다.

이 시기 또 하나의 변화는 독립운동 인식의 확대이다. 근래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여성독립운동을 발굴하고 사회에 알리려는 움직임은 1990년대부터 나왔지만, 2000년대에 들어 더욱 확산됐다. 여성독립운동 연구가 활발해지고, 수기가 활자화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3·1절 기념사에서 여성독립운동가를 사회에 불러냈다. 기념사에서 언급된 여성독립운동가는 유관순과 함께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부산 일신여학교 학생들, 윤희순, 곽낙원, 남자현, 박차정, 정정화 등이었다. 부산 일신여학교의 3·1운동 주도 학생들 중 다수는 이미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일부는 이후 서훈되었다.

허은이나 이은숙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것은 단순히 그동안 빠진 여성독립운동가를 찾아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독립운동의 범주를 확대한 것이다. 독립유공자 인정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2000년대 이전 인정된 여성독립유공자는 의병, 3·1운동, 농어민운동, 노동운동, 의열투쟁, 학생운동, 광복군과 같은 영역이다. 물론 이는 애초 독립유공자 서훈을 위한 분류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여성적 관점으로 보면 이런 구분 자체가 남성의 활동 영역이 기준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시위를 조직하고 적극 참여한다든지,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해 활동을 하고,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에 집단으로 맞서는 것 외에, 가족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가정을 유지하고, 한인 사회에서 교육과 홍보를 하는 것도 독립운동의 범주로 정식 인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허은의 수기는 여성이 어떤 식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는지를 알림으로써 여성독립운동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높였으며, 나아가 독립운동 인식의 폭을 확대했다.

독립유공자 지정과 예우, 재검토를 위한 과제

독립유공자 서훈의 범주는 사회 분위기와 정치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우리는 이제 독립운동가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해소해야 할 몇 가지 과제를 갖게 됐다. 이 과제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

첫째,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을 독립을 위한 활동 자체로 보아야 하느냐, 이후 대한민국과의 관계까지 고려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대한민국 건설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자격요소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앞서 나온 공훈록 규정이나 김원봉 서훈 논쟁에서 보듯이 여전히 공산주의자들, 특히 북한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서훈을 부정적으로 본다. 이 문제는 국가유공자 서훈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는 관점과도 관련이 있다. 보훈을 국가나 그 구성원에 대한 공헌과 희생의 보상으로 볼 것인가, 국가나 민족정체성의 확립을 목적으로 할 것인가 하는 관점 차이도 들어가 있다.

둘째, 서훈과 정치적 성향의 밀접한 관련성이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기저에는 그 자체 못지않게 정부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다. 여성독립운동가의 서훈을 보는 관점에도 이런 갈등이 개재된다. 여성독립운동의 발굴과 독립유공자 서훈을 놓고 독립운동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설정해야 하는지 논의보다는, 페미니즘 확산의 산물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성별의 차이로 반감을 가지는 현상도 나타난다.

셋째, 독립유공자 서훈을 통해 한국사회가 찾아야 할 독립운동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근래 독립운동을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국권을 되찾는 운동이라는 것을 뛰어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통일 등 사회와 인간이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으로 보려는 경향이 나오고 있다. 특히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었던 2019년에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면서 독립운동의 의미를 이런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논의들이 활발했다. 이런 방향으로 독립운동의 의미를 해석하고 평가하려는 경향이 바람직한 것이라면 독립유공자 지정이나 예우 등도 이에 맞춰 재검토할 여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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