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열린 ‘빛나는 내 인생’ 참전유공자 어르신 자서전 쓰기 발대식 모습. 참전유공자 12명과 영주여고 학생 24명이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구순의 참전유공자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그의 손에는 태어날 때부터 스무 살 어린 청년으로 전쟁에 참가했던 고난의 경험과 이후 지금까지 일궈왔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 들려있었다. ‘빛나는 내 인생’이라 적힌 그의 자서전 제목처럼 빛나는 얼굴을 한 그의 곁에는 그를 도와 자서전을 완성한 손녀딸 같은 영주여고 학생들이 서 있었다.

자서전 작업 당시를 떠올리며 대화 중인 정연흡 어르신, 정다운·전우림 학생(왼쪽부터).

지난해 ‘빛나는 내 인생’ 자서전쓰기 프로젝트를 통해 참전유공자 어르신 12명과 경북 영주여고 학생 24명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됐다. 6·25전쟁 70주년을 기념해 시작된 이번 프로젝트는 영주여고 자서전 동아리 학생들과 영주시종합사회복지관이 경북공동모금회의 지원을 받아 함께했다.

참전유공자 어르신 1명과 영주여고 학생 2명이 한 조가 되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어르신의 일생을 채록하는 방식으로 작업이 시작됐다. 정다운(18), 전우림(18) 학생과 정연흡(90) 어르신의 만남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초면에 인생을 털어놓기에는 어려움이 많기에 학생들과 어르신은 친해지기 위한 여러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레크리에이션을 하며 함께 퀴즈를 풀고, 같이 비누와 화분을 만들면서 조금씨 가까워져 얼굴만 봐도 미소가 그려지는 사이가 됐다.

본격적으로 채록 활동이 시작되자 두 학생은 난항에 부딪혔다. 생소한 전쟁용어를 비롯해 세월의 차이로 인한 표현의 간극이 너무 컸던 것이다. 어르신께서 미리 손수 써오신 내용도 한자가 많아 사전을 들고 찾다가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때는 한문 선생님께 물어가며 기록을 정리했다. 안동대 김주환 교수님께 자서전 작성법 등 자문을 받으며 작업을 계속했다.

“저는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교과서로만 배웠던 근현대사를 그 시대를 직접 살아낸 분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누군가의 일생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요. 그것도 지금의 우리가 있게 해주신 정말 감사하고 존경스러운 분들의 인생을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나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정다운, 영주여고 3학년)

“생생한 역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르신과 차분히 오래 대화하며 공감을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어르신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듣다보니 친할아버지 한 분이 더 생긴 것 같고요. 어르신께서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인 제게 정말 도움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전우림, 영주여고 3학년)

정연흡 어르신은 “세월이 오래 흐르다보니 기억이 많이 희미해져 두 학생들이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 정말 열심히 임해줘서 고맙고, 이대로 나라는 사람이 잊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책으로 남겨줘 자녀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자랑스럽게 내보일 수 있게 됐다”면서 활짝 웃었다.

“마음씨 고운 여러 학생들 덕분에 참전유공자의 인생이, 우리의 삶이 기록으로 남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로 전해질 수 있다니 정말 감동입니다.”

지난해 11월까지 자서전쓰기가 마무리됐고, 12명의 어르신들은 각자의 인생이 담긴 책을 한 권씩 품에 안았다. 성대하게 준비한 출판 기념식은 코로나19로 아쉽게도 열리지 못했지만 대신 12월 말 영주시종합사회복지관에서 영주시종합사회복지관과 경북북부보훈지청 담당자, 참전유공자 대표가 참석해 소소하게 자서전과 기념품을 전달하는 훈훈한 시간을 가졌다.

인터뷰를 위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세 사람 사이에는 반가운 인사말과 작업하면서 못다한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었다. 손녀딸을 보듯 따뜻한 눈으로 두 학생을 바라보는 정연흡 어르신은 자신의 청년시절을 떠올리는 듯 했다. 1951년 참전해 생사의 기로에 섰던 시간들을.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두 학생들을 비롯한 후손들이 겪지 않도록 나라를 지켜낸 것에 그는 안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참전유공자의 자서전을 채록하는 일은 참전유공자 개인의 기쁨이 아닌 모두에게 배움이자 자부심으로 남았다.

저작권자 © 나라사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