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23일 6·25전쟁 70주년과 유엔군 참전의 날을 기념해 창원엔씨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시구에 앞서 손담 참전유공자가 행사에 함께 참여한 마이클 R.바스 미해군진해부대장 등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책보자기 대신 30kg이 넘는 통신기를 등에 짊어지고 학교 대신 전장으로 향했던 15세 소년이 있었다. 나라의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나이마저 속이며 자원입대해 기꺼이 6·25전쟁에 나섰던 소년은 이제 아흔을 바라보고 있다. 진해중학교 교정의 참전기념비에 남겨진 전우들의 이름을 바라보는 손담(87) 6·25참전유공자회 경남 창원시 진해지회장의 눈가에는 자부심과 함께 지난 세월의 회한이 스치는 듯 했다.

아흔 가까이 고향을 지키고 있는 손담 지회장은 지역사회에서 참전유공자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그는 인생의 선배이자 전쟁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안보의식을 길러주기 위해 현충시설을 정비하고, 역사를 기록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참전유공자들의 희생과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알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제가 몸소 겪은 교훈들을 후배들에게 잘 전해야한다고 다짐합니다. 그 생각은 항상 나라를 위하는 일에 앞장서야겠다는 의지로 이어지고 있지요. 그것이 앞서간 전우들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이자 추모의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그의 인생은 평생을 나라를 위해 헌신한 역사였다. 전쟁이 끝나고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37년간 군무원으로 일했고, 퇴직 이후에는 18년간 6·25참전유공자회 경남 창원시 진해지회의 사무국장을 지냈고, 지금은 진해지회장 일을 맡고 있다.

또한 그는 퇴직 후 군이나 초·충·고등학교의 요청을 받아 2000년대 초반부터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는 강의를 열심히 했다. 그를 잘 아는 친우들은 그에게 “가정에 5점, 나라에 95점”이라며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그는 후배들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퇴직 후 휴식을 가지며 때때로 지역의 참전유공자들과 전방의 부대에 위문방문을 하곤 했었습니다. 1999년 연평해전으로 부상을 입은 장병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전우들과 모금을 해 병원비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손담 지회장은 지역의 현충시설을 재정비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진해중학교 교정의 참전비는 1999년에 설립됐지만 그간 제대로 된 안내판 하나 없는 상태로 방치돼 있었기에 그는 이를 바로 잡는 일을 자신의 몫이라 여겼다. 총동창회와 지방자치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 참전했던 선후배이자 전우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찾았다. 2016년에야 비로소 참전비는 안내판과 함께 제 모습을 되찾았다.

“생각보다 많은 6·25전쟁 관련 현충시설물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거나 방치된 곳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참전유공자들이 고령이 되어 시설들을 정비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기울여 준다면 현충시설물들이 제대로 빛을 보게 될 겁니다.”

오랜 기간 참전유공자로서 지역에서 활동한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는 지난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창원엔씨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경기에 시구자로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가 경기장에 들어서자 전광판 가득 그의 얼굴과 함께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나타났고 이어 70여 명의 6·25참전유공자들이 사진으로 소개됐다.

또 그는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6·25전쟁의 세세한 기억들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열중하고 있다. 2018년에는 지인과 함께 ‘6·25전쟁 격전지 탐방, 마산방어전 루트를 찾아서’라는 책을 집필했다. 지난해에는 자신의 6·25전쟁의 수기를 작성해 국방부에 전달했고, 이 수기는 6·25전쟁 100주년이 되는 2050년에 빛을 보게 될 기억상자(타임캡슐)에 들어가 국립서울현충원에 묻혔다.

손 지회장은 그 수기 속에서 지난 삶의 궤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원입대를 하기 위해 나이를 속이고 무전병으로 전장을 누비며 생사의 기로에 섰던 나날들을.

그렇기에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멈출 수가 없다. 남은 여생도 국가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에게서 여전히 자원입대하던 소년병의 단단한 결의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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