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길을 걷다 마주친 들꽃을 보고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작은 생명들은 피고, 지며 생애를 지나간다. 우리나라 문학계의 거대한 기둥인 두 작가, 박완서의 ‘세상에 예쁜 것’과 박경리의 ‘생명의 아픔’을 통해 생명, 살아있으므로 지니는 그 찬란함을 들여다본다.

박완서 ‘세상에 예쁜 것’

 

△할머니는 나의 사소한 질문에 대답할 때도 성의껏 이야기로 대신하셨다. 할머니는 푸성귀를 데치거나 국수를 삶고 난 더운물을 시궁창에 버릴 때도 반드시 큰 소리로 더운물 내려간다, 소리치고 나서 잠시 머뭇거린 후에 버리셨다. 누구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고 여쭤보면 시궁창 바닥에 살고 있는 온갖 미물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해주셨다. 미물 중에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독종도 많다고 했다. 못된 독종 좀 죽으면 어때서라고 하면, 독종만 죽는 게 아니라 지렁이도 죽을까 봐 그런다고 했다. 지렁이는 바보 같아도 그런 미물 독종들을 잡아먹을 수 있으니까 호랑이보다 더 힘이 셀 뿐 아니라 땅을 기름지게 하니까, 농사꾼들이 잘 보살펴야 한다고 하셨다. 도망갈 시간을 주고 더운물을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도 사람이 사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도리가 담겨 있었다.

△남편이 나를 앞서 저세상으로 간 지 금년이 이십 년째가 된다. 일 년 남짓한 투병생활이 허사로 끝나고 임종의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도 남편은 마지막으로 그 동네 그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그는 혼자 걷기도 어려울 때였지만 우리는 그게 마지막 소풍이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식구들이 총동원해서 짐짓 명랑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목이 메는 심정으로 그 매운탕집엘 갔다. (중략) 그리고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쐬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제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때는 보이는 모든 것이 왜 그리도 아름다웠던지. 젊은 내 새끼들의 옷깃과 검은 머리칼을 나부끼게 하는 바람조차도 어디 멀고 신비한 곳으로부터 그 애들이 특별히 아름답게 보이라고 불어온 특별한 바람처럼 느꼈으니까. 아마도 나는 그때 곧 세상을 하직할 남편의 눈으로 그 모든 것을 보았을 것이다.

△도시에서 피폐해진 심신을 고향에 가서 충전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 오던 행복한 버릇을 6·25가 나던 해부터 못하게 되었으니 그걸 못하게 된 지 60년이나 된다. 그런데도 지금도 꿈을 꿀 때 행복한 꿈은 거의 그 무대가 시골집이고, 악몽은 도시가 무대다.

아무리 잘 먹고 운동을 많이 해서 좋은 체격을 가져도 자연과의 교감이 없는 건강은 왠지 미덥지가 못하다. 지식 또한 자연과 부대끼며 터득한 경험 없이 교과서에서 배운 걸 시험 치기 위해 달달 외운 지식이 미덥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미덥고 안 미덥고를 떠나서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 위력과 자비를 모르고 자라는 요새 아이들을 보면 이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괜히 불쌍해질 때가 있다.

△고통스럽던 병자의 얼굴에 잠시 은은한 미소가 떠오르면서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니 잠든 아기의 발바닥이었다. 포대기 끝으로 나온 아기 발바닥의 열 발가락이 “세상에 예쁜 것” 탄성이 나올 만큼, 아니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수명을 다하고 쓰러지려는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그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아기의 생명력은 임종의 자리에도 희망을 불어놓고 있었다. 찬탄이 절로 나왔다.

‘세상에 예쁜 것’

불혹의 나이로 등단해 ‘나목’ ‘엄마의 말뚝’ 등 여러 소설을 출간한 박완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평생을 지탱하는 토대가 된 시골에서의 삶과 6·25전쟁을 겪으며 느낀 좌절과 절규, 등단 후 작가가 되기까지의 역사와 가족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들이 울림을 준다.

“흔들리며 배어나오는 영혼의 율동”

박경리 ‘생명의 아픔’

 

△우리 민족의 문화는 멋으로 집약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선은 생경하다. 그러나 곡선은 유연하다. 그리고 흐름이다. 우리의 산천이 그러하고 우리의 구조물, 의복 할 것 없이 일체의 생활용품에도 곡선을 선호한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버선의 코까지, 외씨 같은 버선발이라는 그야말로 간드러진 표현도 바로 그 곡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명은 율동감이다. 흔들리며 배어 나오는 영혼의 율동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존중돼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며 결코 물질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작은 콩새 한 마리 매달리듯 차창에 몸을 붙이고 지나가는 풍경을 골똘히 바라본다. 서울로 가는 길 언저리의 산천은 언제 보아도 새롭다. 나 자신 한 그루 나무가 되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생명의 몸짓 소리들이 드높은가 하면 낮게 아주 나직이 속삭이듯, 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제각기의 분위기, 표정을 지니면서, 또 그 살아 있는 것들이 군집한 산들로 각기 독특한 제 자신의 표정을 지니면서 숨 쉬고 있었다. 새삼스런 일도 아니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아름답다.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 이상의 진실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까지 껴안으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달마대사 같은 성인은 소림사에서 9년 면벽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범인은 가만히 있으면 생각이 정지된다. 노동은 심신을 상쾌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끝없는 생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인다. ‘노동’과 ‘글쓰기’와 ‘나’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 사람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으며 불평등은 인간의 소위로서 자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 대붕(상상의 새)은 쥐벼룩이 너무 작아서 볼 수 없고 쥐벼룩은 대붕이 너무 커서 볼 수 없지만 삶의 궤적은 한 치 오차 없이 동등하다는 것, 자연의 공평함과 오묘함, 실로 돈으로는 환산될 수 없는 내 세계, 나와 더부 살았던 많은 생명들의 세계, 이미 그것은 내 소유에서 떠나버렸다.

△원주의 새벽하늘은 아름답다.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더러는 샛별이 깜빡거린다. 무진장으로 널려 있는 별들과 모든 생물, 보이지 않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그 삶의 운행이 한결같음에 가슴이 떨린다. 소름 끼치게 엄숙한 균형을 우리는 깨면서 스스로 자멸하려 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만난을 헤치고 살아남는다는 것을 믿고 싶다. 핵무기, 오존층 파괴, 대기 오염, 물의 고갈, 잘못 잡혀진 방향을 다잡아 궤도 수정할 것을 믿고 싶다. 결자해지라 했던가. 시끄러운 악머구리 떼울음은 사양의 만가쯤으로 생각하고 보편적 삶을 위한 총체적 인식 아래, 역시 그것은 과학의 몫일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

‘생명의 아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전하는 생명 이야기. 박경리 작가가 강연과 칼럼 등을 통해 발표한 원고 중 생명론과 관련된 글을 엮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현대화로 인해 파괴된 금수강산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에 무심한 현대사회에 날카롭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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