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등에 업혀 시골집을 떠나 늦은 오후에 도착한 곳은 6·25전쟁 발발 후 추가 징집된 장병들의 집결지, 전쟁터로 떠나는 남편이나 아들을 한번이라도 더 만나려고 먼 길을 찾아온 가족들로 붐볐다. 많은 징집자 속에서 남편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가 다급히 쫓아가는 쪽에는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던 손을 차창 밖으로 내젓고 있었다. 잠시 후 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도 어머니를 따라 울면서 고사리 손을 흔들어 주었으나 아버지 모습은 점점 멀어져 갔다.

몇 개월 후에 먼저 입대한 외삼촌의 군사우편을 통해 “아버지는 중부 전선으로 투입되었다”라는 이야기만 간접적으로 들려왔을 뿐 치열한 전투상황으로 인해 이후 소식은 알 수 없었다.

추운 겨울밤, 깊은 잠에서 깨어보니 캄캄한 방안에는 나 혼자 있었다. 갑자기 무서워져 엉금엉금 기어가 방문을 밀고 살짝 열어보니 찬바람과 함께 담장 쪽 장독대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작은 토담집 문지방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엎드려 다리를 먼저 댓돌에 내린 뒤 어머니를 찾아가니 입고 있던 전쟁구호품 코트와 담요로 감싸주며 품에 꼭 안아주었다. 남편과 전우들의 안전을 바라는 어머니의 계속되는 기도소리에 스르르 다시 잠이 들 무렵, 담요 틈 사이로 밤하늘의 은하수와 별들이 반짝이고 저 멀리 교회 새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전선은 북쪽으로 대부분 옮겨갔으나 가끔 후방지역까지 들려오는 대포소리에 놀라 이불 속으로 들어가 방문 유리조각 창의 떨림이 멎을 때까지 숨어 있었다.

높고 푸른 하늘에는 전투기들이 무서운 굉음과 함께 하얀 꼬리 두 줄을 길게 남겨놓고 먼 구름 속으로 사라질 때와 국군을 실은 군용트럭들이 흙먼지 날리며 신작로를 지나가면 어머니는 한참 동안 전쟁터의 남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몇 해 지나 드디어 반가운 휴전 소식이 있었으나 아버지는 몇 달 동안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논두렁에 앉혀 놓고 흙탕물에서 김매기를 하면서도 인근 도로변에 완행버스가 정차할 때마다 허리를 펴고 멍하니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렸다.

늦가을 해가 질 때쯤, 어머니와 외숙모를 따라가 이웃 과수원집 디딜방앗간을 빌려 햇곡식을 찧고 있었다. 방앗간 처마와 낮은 흙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먼 신작로를 따라 우리집 쪽으로 올라오는 아버지 모습을 외숙모가 발견하고 “저기 고모부가 온다!”라고 외쳤다. 함께 있던 외사촌 동생과 같이 밭둑길을 가로질러 먼저 달려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좌·우측 가슴에 안겼다. 저녁에는 밝은 저녁달이 비추는 집 마당에서 인사하러 찾아온 이웃 어른과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갖고 온 초콜릿, 사탕과 껌, 비누를 선물로 나눠주었다.

제대 후 아버지는 틈틈이 전쟁터에서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많은 내용 중 “포탄이 빗발치는 긴박한 전투현장에서 방탄조끼를 입은 유엔군들과 함께 겨우 탈출해 참호 속으로 들어가서 살아남았다”라는 이야기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처참한 전투이야기는 어린 아들에게 더 이상 들려주지 않는 듯 했다.

1981년 현충일 아침, 아버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가 옛 전우들의 명복을 빌며 눈물을 글썽이다 먼 북녘 하늘만 쳐다보았다. 세월이 더 많이 흘러 아버지도 전우들과 함께 국립호국원에 잠들었다. 휴전 후 집으로 돌아와 오붓한 가족과의 행복한 삶도 잠깐, 힘든 투병 중에도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과 어린 외아들을 남겨둔 채 일찍 하늘나라로 떠나갔던 젊은 아내도 함께·‧‧ .

6·25전쟁 발발 70여년이 지나가는 무더운 여름이 다시 찾아왔다. 하나뿐인 소중한 생명과 젊음을 나라에 바치고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순국선열을 비롯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의 고귀한 위국헌신정신, 유가족들의 희생과 아픔은 조국과 함께 영원히 존중되고 기억돼야 하겠다.

정하철 안중근장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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