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광묵 선생은 1896년 김복한 등과 홍주(현 충남 청양)에서 지역 유생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반개화, 반침략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관찰사의 배반으로 의병투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선생은 상경해 도약소를 차리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복수할 것과 친일내각의 외부대신 이완용 등을 탄핵할 것을 상소했다.

선생은 1901년 8월 조정에서 내린 내부주사 직을 “국모의 복수를 할 기약도 없는데 영예를 받을 수 없다”며 강하게 거절했고, 1904년에는 일본인 나가모리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김기우 등과 함께 반대 통문을 작성해 배포하고 직접 일본공사를 만나 일본의 부당한 요구를 비판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1906년 5월 안병찬 등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 전 참판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했다. 선생이 주도한 홍주의병은 구식 화포 2문을 선두에 내세워 홍주성을 포위 공격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성을 점령했다.

홍주에서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이토 히로부미가 보병 제60연대의 참전을 명령했다. 홍주의병 참모장으로 활약하던 선생은 일본 정예부대의 공격을 받아 수백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순국했다. 홍주성에서 항전하던 선생의 아들 규대도 선생과 함께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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