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소 선생은 16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서 수학했다. 1907년 대한제국 진위대 부위로 재직 중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자 만주로 망명해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등에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1919년 3월 선생은 북간도 왕청현에서 서일 등 대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정의단 교관으로 초빙돼 수백 명의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같은 해 10월 기존 조직이 북로군정서로 개편되면서 참모부장으로 임명돼 사령관 김좌진을 보좌하며 부대를 이끌었다.

이어 선생은 북로군정서의 사관연성소 교수부장으로 300여 명의 독립군 사관을 양성했으며 청산리 대첩에 참천해 백운평과 천수평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 정예군대와 10여 차례 벌인 전투. 당시 1,3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는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함한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등 대승을 거뒀다.

청산리대첩 후 선생은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이만 지역으로 이동해 1921년 4월, 36개 독립군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대한독립단 참모로 일했다. 1922년 1월 안도현 군인양성소 사령관에 임명돼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했고 같은 해 8월에는 9개 독립군 단체들의 군사통일체로 대한독립단을 재건하고 전 만주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선생은 1928년 8월 신민부 지방조직을 설치하던 중 돈화현 산중에서 숨을 거둬 평생에 걸친 독립운동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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