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응 선생은 1872년 22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 화서학파의 일원이 됐다. 특히 제천의병장 의암 유인석 선생과는 동문 선배이자 동지인 동시에 정신적 지도자로서 기대며 일생동안 항일투쟁 등 활동의 궤적을 함께 했다.

선생은 1876년 개항 때 최익현 선생 등 화서학파 동문들과 함께 반대상소를 올려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며 처음으로 세상에 그 성명을 드러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1896년 춘천의병장에 올라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다.

춘천의병은 재야 유생, 군인, 보부상, 농민 등 1,000여 명의 다양한 계층이 참여했는데 선생은 ‘효고팔도열읍’이라는 격문을 지어 전국 8도에 보내 의병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백성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선생의 격문은 특히 관북지방 의병 봉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생과 춘천의병은 춘천관찰사로 부임한 친일 관료 조인승을 참형에 처하는 등 기세를 올리며 서울로 진격하던 중 지평군수에게 원병을 요청하다가 체포돼 구금된 사이 경군과 일본군에 의해 춘천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선생은 유인석의 도움으로 탈출한 후 1896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1900년 그와 함께 원주에 정착해 후학을 양성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핍박으로 1910년 경술국치 후 서간도로 다시 망명했다. 선생은 심양 북방의 회각 강평현에서 1930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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