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준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재령의 빈농 집안 출신으로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근무하면서 조만식, 김동완, 이덕환 등 평양 주요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1919년 김성수 선생과 함께 조선의 인재양성을 위해 우수한 학생을 외국에 유학시키려는 목적으로 ‘육영회’설립을 추진했으나 매년 100원 이상 내야 하는 회비 부담과 3·1운동이 일어난 시기적 상황에서 총독부 고등경찰의 방해와 탄압에 의해 무산됐다.

1920년에는 김성수, 장두현 선생 등과 함께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해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다. 선생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 ‘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이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 등 3·1운동을 왜곡한 일본의 여론을 비판했다.

1920년 10월 만주 훈춘에서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조선인 5천여 명을 무차별 학살한 ‘경신참변’이 발생했고, 선생은 이를 취재하기 위해 현지로 달려가 일군의 만행을 취재했다.

선생은 1920년 어느 날 일인 두세 명에 불려 나간 후로 소식이 끊어져 당시 나이 29세에 한국 언론사상 최초로 순직 기자가 됐다.

독립신문은 ‘장덕준 씨 조난논평’이라는 제하에 선생이 일본군에 암살당했다는 기사를 보도(1921.10.28)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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