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생에는 시기별로 그에 응당한 소임이 주어진다. 청소년기에는 학업에 열중하여 미래의 일꾼으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주어진 과업에 충실해야 한다. 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면 집안을 돌보고 자녀를 양육하여야 한다. 한 개인이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려면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국가와 국민도 마찬가지다. 그 처한 시대에 따라 시대적 소임, 즉 시대정신이 주어지기 마련이다. 국가와 국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소임을 다해야 한다. 이는 국가와 민족을 보전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대로 시대정신을 망각하거나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그 나라는 존재를 영속할 수 없으며, 공동체의 발전도 도모할 수도 없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그러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보훈 정책의 3대 기둥으로

독립, 호국, 민주로 정한 것은

시대정신 적확하게 읽은 것

근대 100여 년의 우리 역사는 서구의 300~400년에 맞먹을 정도로 격동의 시대를 보냈다. 시작부터 비극의 연속이었다. 서구 열강의 각축과 위협 속에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문호를 열어야만 했다.

이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처하게 되었으며, 결국은 일제 군국주의자들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는 외교권이 박탈된 을사늑약부터 40년, 국권이 완전히 상실된 한일병탄으로부터는 35년에 달했다. 무려 한 세대를 넘긴 그 악몽의 시절에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1945년 8월,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였다.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였고,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빼앗겼던 빛을 되찾은 광복(光復)의 기쁨도 잠시였다. 완전한 독립국을 꿈꿨던 우리의 소망은 이내 물거품이 돼버렸다. 미·소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 국토는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났다. 광복 5년만인 1950년 6월에는 동족상잔의 참극이 이 땅을 덮쳤다. 민주와 자유를 추구해온 우리는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만 했다. 숱한 선열들이 피로써 되찾은 이 나라를 지켜내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자 최대 과제였다.

1948년 8월, 이 땅에는 자유민주를 표방한 대한민국이 출범하였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출신으로 항일투쟁 대열에 섰던 인물이다. 그러나 장기집권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독재자로 낙인찍혀 1960년 4·19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듬해 군사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 역시 18년간의 장기집권을 통해 숱한 반민주 행각으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30년간에 걸친 독재정권 하에서 숱한 민주인사들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피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유와 민주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가치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자유와 경제적 풍요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국권 회복을 위해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풍찬노숙하신 애국선열, 적의 침입에 맞서 자신의 몸을 초개와 같이 던진 호국용사, 그리고 민주의 제단에 피를 뿌린 민주열사들의 열정과 헌신의 결정체인 것이다. 우리는 이분들의 애국적 삶과 공로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정부가 보훈정책의 3대 기둥을 독립, 호국, 민주로 정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정이다. 이는 매 시기에 요구됐던 시대정신을 적확하게 인식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난극복 과정에서 민중들이 이 땅

지켜온 역사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우리 민족은 대대로 국난극복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어 왔다. 16세기 중엽 임진왜란 당시의 항쟁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다. 무려 7년간에 걸쳐 왜구들이 이 땅을 짓밟았으나 결국 그들을 이 땅에서 물리쳤다. 그 긴 세월을 견디며 종묘와 사직을 지켜낸 것은 일반 백성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이었다. 농민들은 논밭을 갈던 농기구를 들고 나섰으며, 승려들은 불법에 어긋나는 살생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국토와 백성이 보전되지 않고서는 농사일도 염불도 한낱 공염불이 되고 만다. 세상에 제 나라를 지켜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랴.

민중들이 이 땅을 지켜온 역사는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구한말 일본군이 또다시 이 땅을 노리자 꿩, 노루 잡던 산포수들은 의병을 자처하고 나섰으며, 여염집 아낙네들은 나라 빚 갚으라며 손가락과 머리에 꽂고 있던 금붙이들을 내놓았다. 한국전쟁이 치열하던 때 학생들은 ‘책 대신 수류탄과 총을 달라’며 책가방을 내던지고 자원입대하였다. 또 오랜 독재정권 하에서 무수히 많은 학생과 노동자, 시민들이 감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고초를 겪었다. 이는 현대사에서 4·19혁명, 5·18 광주민주항쟁, 87년 6월항쟁, 근래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 선조들은 방관하지 않았다. 바깥의 적들을 향해 총칼을 들거나 내부의 불의에 맞서 맨주먹으로 일어섰다. 물론 이는 국민된 자의 본분이자 임무이기도 하다. 그러니 여기에 지역 구분이 있을 수 없고 노소와 성별, 계급이 문제일 수 없다. 민중항쟁이 숭고한 것은 차별 없는 동참과 그 목적이 순수했다는 점이다. 훗날 훈장이나 연금을 받기 위해 항일투쟁에 나선 애국지사가 있었을까. 민주화운동 표창을 받기 위해 감옥행을 자처한 민주열사가 있었을까. 오로지 제 나라 제 민족을 위해 일신의 안위를 내던졌을 뿐이다.

세 가치, 선후 우열 개념 아니라

나라사랑이라는 맥락에서 같아

독립-호국-민주 세 장르는 각각의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다. 각각 그 시대정신에 호응하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지고지순의 절대선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이 세 가치는 일면 서로 분리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라사랑’이라는 근본정신에서는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이들 세 가치는 선후나 우열의 개념으로 구분을 지을 것이 아니라 상호 공존과 협력의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켜내고 이 나라의 온전한 민주체제를 위한 노력은 같은 선상의 애국 활동인 것이다. 마치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리는 두 개의 철길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를 통해 교훈을 얻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적이라면 보훈은 빛나는 나라사랑의 전통을 통해 애국애족 정신을 함양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정부 차원의 보훈은 단순히 이들의 과거 활동에 대한 예우나 보상 차원이 아니다. 보훈은 국가와 국민들의 의무사항이다. 따라서 보훈은 특정인에 대한 시혜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선심 정책이 돼선 안 된다. 즉, 보훈은 위기에 맞서 합심한 우리 모두의 자존감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민족의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이를 후세에 널리 전하는 거룩한 사업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보면 국가나 민족에게 위기는 언제나 닥칠 수 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환경위기 등 변수가 많은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는 민족은 또다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저력을 갖게 된다.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은 90년이 지나 문민정부 말기의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운동으로 다시 빛을 발한 적이 있다. 소중한 결혼반지나 아이의 돌잔치 반지를 선뜻 내놓은 그들을 현대판 의병이요, 애국투사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미래 닥칠지 모를 국가위기 대비

국민 가슴 속에 나라사랑 심어야

자칫 보훈은 과거에 매몰되기 쉽다. 과거의 행적에 대한 연구, 평가가 주요업무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 일을 다룬다고 해서 생각이나 행동마저 과거에 머물러선 안 된다. 혹여라도 보훈이 지난 일에 대한 보상 차원에 머문다면 국민연금이나 보험회사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역설적으로 보훈은 그 시선이 미래를 향해 있어야 한다.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내다보는 망원경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 보훈은 미래에 닥칠지도 모를 국가위기에 대비해 국민들의 가슴 속에 나라사랑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다.

미래는 위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중한 꿈도 있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는 통일의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에 앞서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외세에 맞서 싸우고 민주화를 위해 바친 열정을 이제는 통일의 길로 모아야 한다. 선열들이 한 몸 바쳐 되찾고자 했던 조국은 온전한 조국이었다. 통일은 통일부만의 일이 아니다. 보훈을 통해 국토통일과 국민통합을 이뤄낼 때 진정한 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정운현 언론인, 역사학자,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공동기획: 국가보훈처 나라사랑·보훈교육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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