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과 해양, 문명과 문명, 제국과 제국, 이념과 이념 사이에 놓인 경계국가·교량국가의 위치로 인해 역사적으로 한국문제는 언제나 국제문제요 세계문제였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는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로 연결되었고, 한반도의 전쟁은 동아시아와 세계의 대충돌과 희생으로 연결되었다.

그만큼 한반도에서의 충돌은 규모와 희생과 성격에서 세계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최대의 전쟁 중의 하나인 6·25 한국전쟁 역시 당대 세계의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한반도에서 대결한 전형적인 세계시민전쟁이었다. 이 대참사는 한국인들이 겪은 미증유의 세계전쟁이었던 것이다. 6·25 한국전쟁의 비극을 딛고 미래 번영의 토대를 놓은 국가수호, 안전보장, 전후 복구는 우리 선조들의 희생과 헌신은 물론이려니와, 생명과 인권, 자유와 박애,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당대 세계인들의 참전과 연대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유엔으로서도 창립 이후 최초의 집단안보행위일 만큼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세계사건이었다.

국격과 국가이미지 높이는 중요한 소프트파워의 하나

현대 대한민국의 발전이 이 세계적 대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섰다는 점은 더욱 자랑스럽고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은 세계 속의 당당한 나라가 되었다. 첨단기술, 경제와 무역, 인권과 민주주의, 의료와 방역에서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선진국 수준에 다다랐다. 우리 시대 한국의 성취는 세계 모두를 놀라게 할 만큼 눈부신 것이었다. 이러한 성취를 바탕으로 오늘의 한국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자만하지 않되, 가슴 벅찬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되찾고 지키고 발전시킨 선조들의 고결한 희생에 가장 깊고 뜨거운 경의와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의 경의와 감사, 협력과 연대는 국가와 국경, 인종과 민족을 넘어야 한다. 한국의 국가수호와 번영을 위해 희생한 나라와 국민들에게까지 보훈의 범위를 넓히는, 보훈의 새 지평, 새 차원을 말한다. 즉 국제보훈을 말한다. 대한민국은 이미 원조의 수혜국(受惠國)에서 지원국(支援國)으로 바뀐 지 오래다.

무엇보다 국제보훈은 과거의 도움과 지원에 대한 보답과 감사의 표현이 된다. 한국인들은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잊지 않고 보답하는 마음을 가진 국민이라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줌으로써 국제보훈은 국격과 국가 이미지를 높이는 가장 중요한 소프트파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국제보훈은 놀랍게 발전한 오늘의 대한민국 국력의 반영이라는 점이다. 비약적인 국가발전이 없었다면 국제보훈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것은 국가종합역량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셋째로 국민 심성과 마음의 측면에서 볼 때 국제보훈은 높은 세계 도덕과 윤리의 표출을 말한다. 국력이 허약할 때 침략전쟁을 당하여 세계인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키고 일어서고 도약한 국민으로서, 세계와 세계인을 향한 보편적인 세계시민도덕과 세계시민윤리의 실천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은 세계사랑과 인도주의의 실현이 된다.

넷째로 국제보훈은 가치보훈을 뜻한다. 인류 공통의 가치, 즉 자유와 평화,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가와 국민들을 연결하는 가치연대의 의미를 담는다. 한국이 그러한 가치연대의 선두에 설 수 있는 핵심통로가 바로 국제보훈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제보훈은 장차 한국외교의 중심축의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다섯째로 국제보훈은 미래보훈을 뜻한다. 국제보훈은, 혹여 있을지도 모를 미래의 국난을 대비하여 오늘의 세대가 미래세대를 위해 미리 놓는 튼튼한 주춧돌이 될 것이다. 우리 세대의 번영이 앞 세대의 희생의 산물이듯 우리 세대 역시 미래 세대를 위한 헌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여섯째로 국제보훈은 적극적인 평화보훈을 의미한다. 즉, 과거의 지원에 대한 현재의 국제보훈은 소극적 과거 기억과 감사를 넘어 미래를 향한 적극적인 전쟁방지와 평화수호의 의미를 담는다. ‘오늘의 보훈’은 ‘전쟁의 과거’와 ‘평화의 미래’를 연결하는 최고·최선의 연결고리인 것이다. 인류애를 통한 국제 평화창조 행동인 것이다.

국제보훈 대상 범위 넓히고 공동추모행사 등 적극 활용해야

이러한 복합적이고도 다층적인 의미를 갖는 국제보훈의 구체적인 영역으로는 참전국들의 파견과 지원 규모의 정확한 파악, 생존자 국내 초청, 전투 업적 정리와 홍보, 명예 선양, 참전단체 지원 및 후손 발굴과 연대, 참전국과의 우호증진 및 한국전 관련 기록과 책자 제작 지원,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과 장학 지원, 정기 청년 교류와 상호방문 등 매우 많은 분야가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물론 광복, 건국, 경제발전과 민주화 과정에서의 한국에 대한 국제 헌신과 기여에 대해서도 발굴하고 기억하고 기념할 필요가 있다.

국제보훈의 방식은 양자, 다자, 국제공동의 여러 형태가 가능하다. 가장 많은 협력과 연대가 가능할 양자 방식은 사업추진에 앞서, 우선 기존의 유엔 참전 16국에 더해, 의료지원국 및 그동안 개별 참전국으로 인정받지 못해왔던 나라들 - 이를테면 멕시코, 아일랜드, 수리남 - 에 대한 참전 사실 확정을 통해 국제보훈과 연대의 범위를 넓힐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한국전 참전 국가들은 6대륙 25개국에 달한다. 한국전쟁은 단 한 대륙도 빠지지 않고 참전한 유일한 개별국가 전쟁이었던 것이다.

다자 및 국제공동 방식으로서는 참전국들 전체가 하나의 공동 추모일 - 예컨대 매년 11월 11일 한국전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 을 택하여 공통의 추모행사나 묵념의 기회를 갖는 것도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또한 전체 참전국들을 포괄하는 ‘한국전 참전국 정상회의’, 또는 ‘한반도 평화 정상회의’를 유엔 국제평화기구로 설치·등록하여 연례 정상회담을 갖는 것도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해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다. 한국 주도로 참전국 사이에 정례 보훈장관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것도 의미가 크다. 국제보훈이야말로 적극적 평화외교를 위한 다양한 형식과 내용을 갖는 소중한 통로요 자원인 것이다.

선조들이 가꾸고 발양해 온 ‘세계로의 지혜’ 계승할 때

21세기 한국보훈의 핵심 기조와 방향은 네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보편보훈, 통합보훈, 미래보훈, 국제보훈이 그것들이다. 우리는 이 중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은 2020년 6·25 한국전쟁 70주년의 해를 맞아 국제보훈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매우 의미 있는 계기를 맞은 바 있다.

먼저 세계가 대감염병의 고통과 공포로 신음할 때 유엔참전국들을 대상으로 선제적으로 마스크를 지원함으로써 생명위기에 처한 참전국가와 용사들에게 상당한 반향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둘째 2020년 3월에 제정된 ‘유엔참전용사의 명예선양 등에 관한 법률’로서 이는 한국 보훈사와 국제보훈 실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계기였다. 이에 앞서 한국은 이미 6·25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인 2013년 7월에 ‘참전유공자 예우 및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여 매년 7월 27일을 ‘유엔군 참전의 날’로 제정함으로써 유엔참전국들의 국제지원을 제대로 기억하는 계기를 마련한 바 있다.

국제보훈을 통해 인권과 민주주의, 과학과 기술, 경제와 무역, 첨단제품과 상품수출을 넘어 감사 표시, 인류사랑, 세계윤리, 미래 평화건설에서도 우뚝 선 선도국가가 되길 소망해본다. 경계국가 시민으로서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의 눈과 마음은 언제나 세계를 향해 열려있었고, 또 세계를 품어온 바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인으로서의 품새와 시야가 한국을 지키고 발전시켜온 근본 토대의 하나였다.

국제보훈을 통해 이제 우리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선조들이 가꾸고 발양해온 그 아름다운 ‘세계로의 지혜’를 다시 계승할 때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을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도약시킬 때다.

한국인들과 세계인들의 절대 희생 위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 그 희생을 통해 발전한 우리는 마땅히 세계시민적인 동시에 선도국가적인 책임윤리와 소명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땅과 온 누리가 평화로워질 때까지. 오늘의 우리와 한국을 위해 희생하신 우리의 선조들과 세계의 영령들에게 삼가 하늘의 평안을 기원 드린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 인간평화와 치유연구센터 소장

국가보훈처 나라사랑·보훈교육연구원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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